부안역사/문화기행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by 부안이야기 posted Sep 12, 2016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위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2016·09·12 0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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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봉에서 본 위도의 섬, 섬, 섬


위도(蝟島)는 고려시대 이래 부령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 말에 전남 지도군에 잠깐 편입된 적이 있다. 그리고 1915년부터는 전남 영광군에 속하다가 1963년에 다시 전북 부안군에 편입된다. 위도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섬 생활이란 게 하루하루 끼니 때우기도 쉽지 않았고, 고기잡이 나선 위도사람들은 갑자기 불어 닥친 풍랑과 싸우느라 자신들의 얘기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안군 위도면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이유로 낙후를 면치 못했다. 이곳에는 가난한 자들의 땀과 모진 고난을 자신들만이 감내해야 한다며 외롭게 싸웠던 사람들의 피 같은 절규와 기억이 흩어져 있다. 이러한 위도의 역사를 간략히 풀어가기 위해서는 편의상 열쇠 말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열쇠 말은 ‘공도(空島, 섬 비우기) 정책’, ‘위도진’, ‘조기파시’ 등이다. 이 세 가지 열쇠 말로 어찌 위도의 역사를 다 담으리오마는 위도 사람들의 삶에 접근하기 위한 작은 연결 고리로 삼고자 한다.


위도에서 사람들이 살게 된 때는

2만 여 년 전 위도를 포함한 부안군 바다는 육지였다.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모두 하나의 땅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빙하기여서 해수면은 지금에 비해 140미터나 낮은 곳에 있었다.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지구를 덮고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자 육지 곳곳은 물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바닷물은 계속 상승하여 2천여 년 전에는 현재와 비슷한 해안선이 생겨나고 위도를 비롯한 칠산 바다는 몇 개의 산봉우리를 섬이라는 이름으로 물속에 남겨놓았다.
섬 지방에서 현재까지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사람의 흔적은 신석기인일 것이다.1)김영회, 『섬으로 흐르는 역사』, 동문선, 1999, 18쪽. 위도에서 선사시대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현재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위도와 가까운 격포 주위의 변산 일원에서는 신석기 유물들이 흔하게 발견된다는 증언이 있다.2)고수영 증언, 변산서중학교 교장. 또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된 변산면의 대항리 패총은 해변을 따라 조개미마을 바닷가 언덕에 묻혀 있는데 신석기 유적이다. 변산과 위도가 맞닿은 육지였다고 생각할 때 위도에서도 신석기인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자연스런 추정이다.


◀위도진영도(조선후기 지방지도, 규장각 소장)

위도가 사서(史書)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이다. 전라도 고부군 보안현에 대한 설명에서 현재 쓰는 위도(蝟島, ?벌레충)가 아니라 위도(?島,?개사슴변)라는 한자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서에 이름이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위도에는 사람이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도 사람들의 삶터 가운데 주목되는 곳은 치도리이다. 갯벌이 발달한 치도리 앞바다에는 두 개의 딴치도가 있어서 풍랑이 일 때 방파제 역할을 할 여건이 되었다. 치도리 뒤편에는 깊은금이 있는데 물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적당하고 농사짓기가 가능해서 지금도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치도리 주변 깊은금 쪽에서 대형 돌방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은 60여 기에 달하는데 고대 위도에 대형 취락지가 존재했을 가능성과 함께 국제 교역의 요충지로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돌방무덤은 백제의 전형적인 묘의 형식인데 위도의 돌방무덤은 3~4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로 보면 위도가 백제 초기부터 중앙정부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에 따르면 여기서 발굴된 동전은 송나라 휘종 년간(1102~1108)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고, 고려시대 투구로 보이는 것도 발견되었다. 용궁의 모습이 새겨진 기와 등도 발견된다.
치도리에서는 4개의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돌이다. 고려시대 원나라 사신들이 양쯔강 하구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간 기착지인 위도에서 개경으로 항해할 때 무사안녕을 비는 뜻에서 당시 해변에 묻었던 비석으로 해석한다. 돌의 재질이 일반적인 화강암이나 현무암이 아닌 백석(차돌)으로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며 중국에서는 양쯔강 하류에서 생산된다. 제주도 해안이나 광양, 영광 등 남서해안 바다 속에서 어부들의 그물에 석상이 들려 올려진 사례들이 있는데 불교와 토속신앙이 결합된 미륵불 신앙이다. 이것은 풍어와 무사항해의 염원과 관련 있다.3)「부안서림신문」, 1999. 10. 25.
험한 바다를 항해하던 고대인들은 항해하기 전에 해안가나 섬에서 풍랑이 잔잔해지기를 빌며 제사를 지냈다. 격포의 수성당도 그것의 하나이고 위도 대리의 원당제나 치도리 뒤쪽에 있는 내원암도 그런 염원을 구하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과 구전을 종합하면 치도리는 위도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항구로 추정되며 외부인들이 위도에 들어가는 들머리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섬을 비우는 정책과 위도사람들

고려 말에는 공도(空島) 정책을 써서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했다. 강봉룡은 이 공도 정책은 고려 때 삼별초 난에 동조한 서남해의 해상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며, 왜구와 섬사람들의 연대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4)강봉룡,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한얼미디어, 2005, 227쪽.
고려 말 공도 조치는 해양국가 고려의 해양력을 약화시키고 바다를 지킬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더욱 극렬한 왜구 침탈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주장도 이어진다.5)강봉룡, 위의 책, 230쪽.
공도 조치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더욱 강화되고 전면화 되어 국가 정책으로 자리잡아갔다. 관의 허락 없이 섬에 몰래 들어간 자는 장 100대의 형으로 다스렸으며, 심지어 섬에 도피·은닉한 죄는 본국을 배반한 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 되었다.
섬은 해안 어민들에게 어업 생산의 중요한 장이었고 생활 근거지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섬이란 국왕의 지배와 보호가 미치는 통치의 대상이 아니었고, 행정 편제의 대상에서도 배제되었다. 따라서 백성들이 섬에 들어가는 것은 곧 국왕의 통치권에서 벗어남을 의미했다.
점차 섬은 왜구의 소굴로 변해갔고, 그럴수록 조정에서는 섬에 거주하는 것을 더욱 엄금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동시에 왜구들이 섬 주민이나 해안가 주민들과 연합하여 해적처럼 약탈하고 해안가 사람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등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위도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를 키운 것은 병선을 만들기 위함이었다.6)『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1448. 8. 27.
공도 정책으로 섬을 비웠다면 위도에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을까? 조선 초기의 자료에는 위도에 어전(漁箭, 어살)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어와 석수어(조기)가 잡히는 주요 산지로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어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유승선(柳承善)은 위도 등의 섬에서 이루어지는 관리들의 부패와 어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명종 14년(1559)의 유승선의 상소에,

어전의 폐단도 근래에 더욱 심하여 어부가 안접(安接)하지 못하고 깊숙이 해도로 들어가는 실정입니다. 지금 청홍도의 저도와 부안 땅 위도 등도 다 수사지(受賜地)로 되어 그 작폐가 무수한데다가 병사와 수사의 횡포까지 심합니다. 그러므로 어부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사방으로 이산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왕자와 부마들이 하사받은 어전은 일시에 다 반환시킬 수는 없으나 거리가 먼 곳의 것은 속공(屬公)시켜 어부들이 안접하도록 하심이 옳을 듯합니다.7)『조선왕조실록』 명종 14년, 1559. 2. 9.

양란 이전에 위도 어전의 수세권을 성균관에서 가졌음도 나타난다.8)『조선왕조실록』 효종 6년, 1655. 7. 24. 공도 정책을 쓰는 동안에도 위도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관의 눈을 피해 섬으로 들어가 살면서 어업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위도와 부안 앞바다(동여도)/1856~1859, 김정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위도에 수군진을 설치하다

공도 정책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숙종 년간이다. 위도 등 섬에 수군진(水軍鎭)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그 규모에 따라 첨사·만호·별장 등의 지휘관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섬을 지키는 군사적 임무 이외에 행정적인 수령의 업무까지 겸하였으니, 이는 곧 섬에 주민의 거주를 공인하고 사실상 공도 정책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안 사람 김몽두(金夢斗)는 숙종 7년(1681)에 위도에 진을 설치하도록 상소를 올렸다.9)『조선왕조실록』 숙종 7년, 1681. 3. 17. “위도의 형편을 말하고”라 되어 있는데, 여기서 형편은 위도에 사람들이 살지만 왜구의 침입과 관의 힘이 미치지 못하므로 발생하는 여러 폐해를 말했음 직하다. 숙종 8년(1682)에 위도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임치·고군산·산목포·다경포·법성포·검모포·군산포·신도의 8보를 위도에 소속시켰다.
숙종 9년 첫 위도 첨사로 임명된 이송노(李松老)는 부임 직후에 위도에 관아를 지었다. 객사용으로 2칸 팔작지붕 건물을 짓고 이곳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봉안(奉安)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이처럼 대례를 행하는 것은 진장(鎭將)으로서 역할 뿐 아니라 수령으로서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0)「조선후기 전라도 부안현 위도어전의 구관분규와 수세문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4, 32쪽.
위도가 처음부터 종 3품인 무관 첨사(僉使, 僉節制使의 약칭)가 관장하는 큰진(巨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은 어획량도 많고 진장이 어세를 관리하도록 하여 진의 재정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강화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격포가 강화도의 ‘목구멍(咽喉)’으로 인식되면서 위도와 함께 진을 강화하여 강화도의 방어에 힘썼기 때문이다.
위도진이 설치되면서 위도에는 인구 증가가 따랐다. 섬에 들어가는 입도(入島)가 합법화되면서 육지에서 곤궁함을 면키 어려워진 사람들이 어염(魚鹽)의 이익을 좇아 섬으로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다. 섬 주민들이 소지한 족보를 통해서 처음 섬에 들어간 각 성씨별 입도조(入島祖)를 파악하면 대부분이 수군진 설치를 전후한 시기에 섬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11)강봉룡, 같은 책, 301쪽.
위도는 일찍부터 우리나라 주요 유배지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때 이규보, 조선에 들어와서는 장찬, 유명견, 이명회, 여선장, 김치후, 이훙종, 윤태연 등이 위도에 유배되었다.
조선 초에는 위도에 귀양이 없다가 위도진이 들어서면서 유배지로 활용된다. 중죄인을 유배형으로 보내는 것은 죄인을 감시할 수 있는 국가의 군사 행정기구가 있는 곳에서만 집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에 대한 인식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는 생각이 강하여 숙종 년간에 처음 섬에 유배를 보냈을 때는 ‘너무 잔혹한 처사’라는 말도 있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에 유배되는 경우는 죄과가 매우 높은 양반에 해당된다. 이런 섬에 귀양살이를 떠나는 것을 절도안치(絶島安置, 외딴섬에 격리함)라 했는데 가족을 떠나 일반인들과 격리된 유배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이 유배인을 위도 사람들이 돌보아야 했는데 섬 주민 자체가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돌보기가 쉽지 않았으니 그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위도관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고종 1년(1864)에 위도첨사 김윤항(金潤恒)이 탐욕하고 불법한 일을 저질러 그 죄상이 해당 관청에 알려졌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그런데 하소할 곳 없는 백성들이 그들의 침해와 학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곳곳이 그러하니, 어찌 가엾은 노릇이 어니겠는가? 이런 자들을 한번 호되게 징벌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탄환만한 조그마한 섬에서 3,000냥이나 탐오(貪汚)하는 큰 죄를 저질렀으니, 양심도 없고 두려움도 모르는 행동으로 더욱 극히 해괴한 일이다.”12)『조선왕조실록』, 고종 1년, 1864. 3. 1.

위도를 ‘탄환만한 조그마한 섬’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섬에서 3,000냥이나 되는 거액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끌어 모았으니, 할 말을 잃은 것이다. 해당 수사(水使)가 위도 첨사 김윤항을 군사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 30대를 엄하게 친 다음 멀고 험악한 섬에 보내어 종으로 삼으라고 명령한다. 위도는 섬이라는 구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외부에 죄상을 알리기도 쉽지 않았고 첨사가 불법을 저지르고 억울한 일을 위도 사람들에게 강요해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첨사는 섬 안의 전제군주였던 셈이다.
위도가 전략적인 요지인 것은 사실이나 배를 정박할 만한 곳도 없고 위도에 속한 군인들은 위도를 떠나 훈련할 때면 큰 풍랑에 몸을 맡겨야 했다. 훈련 중에 배가 파선되어 100여 명이 죽는 사고도 잇따랐다.

전라도 위도진의 군졸 1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으니, 휼전(恤典) 거행을 명하였다.13)『조선왕조실록』, 숙종 39년, 1713. 8. 16.

여기서 과연 위도 수군진의 군졸들은 누구였을까. 위도의 일반 백성들일 가능성이 크다. 정부에서는 섬사람들을 단속해서 대오를 만들고 시시때때로 무예를 익히도록 했다. 위도·격포·군산·검모포 등 4진이 수영에 이속되어 봄과 가을에 춘범(春帆)과 추범(秋帆)으로 수군을 조련하러 군산에 갔다가 배가 패몰되거나 물에 빠져 죽는 방졸(防卒)이 속출했다. 칠산바다의 위험을 실록은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칠산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장노삼노(長老三老, 노련한 뱃사공)라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14)『조선왕조실록』, 영조 1년, 1725. 4. 19.


▲위도면 치도리에서 출토된 석상


조기파시와 위도 사람들

파시(波市)는 조선 전기부터 소규모로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기에 와서는 중개인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파시가 형성되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발달된 고기잡이 기구와 다양한 유통 경로 등이 생기면서 활발해졌다.
위도 조기파시는 1930년대를 전후하여 매우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파시로 인해 위도 지역에는 많은 변화와 새로운 모습들이 나타났다. 위도 파시는 진리에서 먼저 형성되었다가 1920년대에 치도리로 옮겨간 것으로 이해된다. 어장에서 가까운 곳은 치도리였고 이곳은 넓은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1920년대에 서해안에서 조업하는 안강망 어선이 많이 모여들었고, 이 무렵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은 치도리 앞바다인 형제섬 근방이었다.
1940년대 초에는 수심이 깊은 파장금으로 옮겨간다. 이유는 연안 수자원이 고갈되면서 연근해로 진출해야 할 필요성으로 대형화되는 어선이 등장하면서 수심이 깊은 포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치도리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썰물 때 바닥이 들어날 정도여서 대형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했다. 소수의 주민들이 거주했던 파장금 마을은 치도리의 파시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위도를 대표하는 어항이 되었다.15)서종원, 「위도 조기파시의 민속학적 고찰」,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4, 95쪽.


▲1930년대 위도 치도리/전국에서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들어 장불엔 더 이상 배 댈 곳이 없어 보인다.<사진출처: 『개도100주년 기념 사진집-전남100년』, 전남도청, 1997년 간>


▲위도파시/각지에서 몰려든 배(경향신문 1961년)


▲위도파시/항구와 여인들(경향신문 1961년)


외지인들이 잡은 조기는 상고선에 의해 처리하는 방식이 유력했다면, 자본이 적은 위도 주민들은 개인이나 친척끼리 작은 배를 가지고 연근해 어장에서 조업하여 잡은 고기를 염장하거나 덕장에 말린 다음 줄포장이나 법성포 등에 내다 팔았다. 조기파시에 전국에서 모여든 어부들은 치도리 해안을 따라 길게 움막을 치거나 임대해 놓은 집에 거주하였다. 장사들도 몰려들었는데, 어부들을 상대로 생활필수품과 어구 등을 판매하던 선구점·잡화점 등도 생겨났다. 어부 등을 상대로 하는 유곽엔 손님이 그치지 않았다.
간이 이발소, 목욕탕들도 운영되었다. 일제 강점기 조기파시의 중심지인 치도리에는 파시철이면 외지에서 온 연희패들이 공연하던 공연장이 별도로 있었다. 이들은 파시가 끝나면 위도에서 철수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신안군 임자도 타리 지역에서는 ‘위도에서 벌어서 타리에서 털어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도지역의 파시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얘기한다.16)서종원, 같은 논문, 2쪽. 위도파시는 1970년대 초를 전후하여 위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근영은 위도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은 얘기를 ‘변산반도 탐승기’에 기록했다. 파시가 서면 위도에 모이는 어선, 임시우편소, 술집에 있는 작부들의 노래로 위도가 떠나갈 듯 했다고 한다.

채석강에서 좀 멀리 떨어져 위도라는 섬이 석양의 나무숲처럼 은근하게 보인다. 여기가 곧 파시로 유명한 곳이다. 해마다 한식 때부터 입하 때까지 수천 척의 어선이 이 섬으로 모여들어 팔고 사고 생선장이 벌어진다. 이때 면에는 임시우편소도 생기고 요리집도 생기어 주야분별 없이 그칠 줄 모르는 노래와 장고 소리로 섬덩이가 떠나갈 것 같다는 것이다.17)「동아일보」, 1938. 7. 18.

위도에 출어한 어부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많았는데 조선인 230인, 일본인 250인이다.(동아일보, 1924) 목포와 위도 등을 연결하는 무선전화를 체신당국이 임시로 설치하도록 한다. 이것은 연락체계가 형성되지 않으면서 어업자와 상인 간 상품 취급상 막대한 불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기간은 4월 20일부터 6월 24일까지이다.(동아일보, 1938) 이처럼 고기잡이가 벌어지는 어장인 위도에 우편소를 설치했다는 것을 신문에서 다룰 정도로 위도의 조기파시는 중요한 기사거리였다.
1938년에 조기잡이로 위도를 중심으로 모여든 어선은 2백 척의 다수인 동시에 그 승조원은 1천 300여 명이라고 한다. 위도에는 요리점 9개소, 음식점 11개소가 생겨서 대 번창 중이며 당국에서는 무선전화를 준비하여 목포 무선전화국과 교신하도록 하였다.18)「동아일보」, 1938. 4. 22.
위도에서 전해지는 말 중에 “이준수, 조기 판 돈 세다가 말캉 무너졌다.”는 말이 있다. 너무 돈을 많이 벌어 돈을 세다가 돈의 무게 때문에 마루가 무너졌다는 우스갯소리다. 조기로 인해 경제가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법성포와 줄포는 위도와 큰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줄포 포구에는 삼양사 등 정미소가 있어 위도에 필요한 쌀을 공급하였다. 위도에서 생산되는 농작물로는 겨울 한철도 버티기가 어려웠으니 쌀 등 생필품을 들여와야 살 수 있었다.


고단한 삶을 보듬고 가다

바다는 풍랑으로 섬사람들의 생명을 노린다. 70명의 어부의 생사가 불명이라는 1927년의 기사, 태풍으로 400여 어선이 조난사고를 당했다는 1948년의 기사, 곰소에서 위도를 향해 1959년 4월 22일에 출발한 통도호 침몰사건에는 구조작업 절망이라는 기사가 따른다. 위도의 조기잡이가 항상 성한 것은 아니었다. 아래 1931년의 기사처럼 조기가 잡히지 않으면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조기의 명산지인 전남 영광의 위도는 작년 혹독한 불어(不漁)와 그 뒤를 이은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매년 그 이듬해에 어산(漁産)으로 변상할 것을 조건으로 줄포방면에서 조달되는 식량이 전면 두절되어 700 어민의 생활은 완전히 기아선상에 방황하고 있다.19)「동아일보」, 1931. 2. 10.

위도가 섬이지만 육지에서 이루어지는 일과 마냥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증언에 따르면, 한말에 일본수비대가 의병을 찾으러 위도에 들어왔다 한다. 부안 변산을 중심하여 활동하던 의병들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일본군들의 공격을 피하느라 섬 등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위도에 들어온 일본수비대는 호적대장에 없는 자는 의병으로 간주하여 죽이려 했다. 그때 대리마을 구장인 이도법은 이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내가 게을러서 이들을 호적에 미처 못 올렸습니다. 나를 죽이시오.” 하자 일본수비대가 감동하여 섬에서 철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즉석에서 호적에 올렸는데, 김감탕이니, 김짝귀니, 꺼꾸리니 하는 이름들이다.20)이형식 증언, 위도면 대리 출신, 1937년생.
일제 강점기 일본은 섬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 어업조합과 면사무소와 학교를 세워 위도 사람들을 통제했다. 위도어업조합은 1919년 3월 28일에 창립되었지만 1928년 12월에야 인가를 받았다. 『조선은행 회사조합요록』에 따르면 위도 어업조합은 위도면 진리에 위치했고 위도의 파시를 비롯한 선박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1929년 영광수산지회 총회에서 5가지 현안을 진정하게 된다. “1.치도리 축항문제 2.법성, 위도, 낙월면의 순회선의 실시 3.공립보통학교 설립 4.어업조합규약 확장 4.음료수정호개착” 등이다. 위도에 제대로 된 항구가 없어서 어획물을 육지에 올려 소비시키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매매해야 하는 점 등에 대해 주민의 불만이 컸다. 섬 생활의 어려움과 소외에 대한 진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총독부 소속관서직원록』에는 위도면장의 기록이 있다. 1919년에 면장을 맡은 김형근(金炯根)을 시작으로 김인서(金仁瑞)는 1931년에서 37년까지 이어진다. 김광술(金光述)은 1939년부터 이름이 올라 있다가 41년에는 창씨 개명하여 김포광술(金浦光述)로 이름을 바꾸며 면장을 이어갔다.


▲위도 갯가를 줄달음쳐 등교하는 아이들(경향신문 1962년)

1930년 9월에 개교한 위도보통학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1931년의 촉탁교원 홍덕행(洪德行)과 훈도 김지호(金支鎬)다. 김학영(金鶴榮)은 1932년 훈도로 시작하여 1938년부터는 위도심상소학교 훈도로 1940년까지 근무한다. 역시 김사엽(金四葉)도 김학영과 같은 기간에 근무한 것으로 나타난다. 1941년부터는 일본인 코바야시 에이조(小林榮三)와 코바야시 료우꼬(小林綾子)가 훈도로서 위도국민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학교가 만들어진다 해도 배울 수 있는 아이들은 소수였다. 월사금이라는 수업료를 내고 배우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1932년에 위도에서 학교나 서당에 다니고 있던 학생은 91명으로 파악된다.21)「동아일보」, 1932. 11. 29. 이것은 1면 1교라는 목표로 학교가 세워진 결과이다. 많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사는 위도에 의사는 1명도 없었다. 부안 지역에서 의사가 없는 지역은 행안면과 위도로 수련의라도 배치될 지역으로 고려되었다.
1960년대만 해도 섬 주민들이 많아서 이곳에 들어온 정치인들은 ‘존경하는 위도 5,000 도민 여러분’이라는 수사를 쓰기도 했다.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장불에 1주일 이상씩 포장을 치고 위도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22)서봉신 증언, 위도면 진리 출신, 1953년생.
그러나 이들의 생활은 아래 기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1962년 특집기사로 제목은 ‘동심’이다. 내용은 작년과 재작년을 통틀어 위도초등학교에서 육지의 중학교로 진학한 아동은 두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이다. 490명의 재적자 중 올해 교과서를 산 아동은 15% 정도에 불과했다. 선생님이 소풍가는 날짜와 장소를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을 끈다. 그 이유는 소풍간다는 날짜를 알려 주면 괜히 집에 가서 ‘신 사달라’ ‘점심 싸달라’고 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경향신문」, 1962. 5. 3.
한때 ‘기(게)도 돈 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위도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영광원자력발전소의 온배수 문제로 수온이 올라가면서 고기가 떠났고,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물길이 바뀌어 흙들이 위도 바다 밑에 쌓이면서 산란 장소를 잃은 고기들도 위도를 떠나버려 바다에 삶을 기대고 사는 위도 사람들의 시름도 깊어졌다.
위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드러내고 기억하는 것은 위도 사람들을 잊지 않고 공감하려는 작은 실천이다. 또한 이것은 풍랑 속에서도 기약 없는 어려움을 떠안고 바다 위에 삶을 기대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위도의 민초들에 대한 헌사이다.

/정재철(백산고등학교 교감)

<부안이야기 13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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