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by 부안이야기 posted Sep 20, 2016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상술재 너머 염소로와 가야개·동진
| 2016·09·20 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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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재 가는 길에서... 필자


「해동지도」에 묘사된 염소로

부안의 진산 상소산은 동서로 날개를 편 형국인데 능선에는 유일한 고개인 상술재가 있다. 읍내 쪽에서 오르자면 지금의 당산로에서 성터길을 타고 서북쪽으로 오른다. 구 천주교 자리와 구 청일암을 좌우로 하며 향교로 들어서는 갈림길에서 윗길로 능선에 오른다. 향교의 무거운 지붕이 올려다보이는 상술재 정상에 이르면 시원한 서해 바람이 감겨오고 서쪽으로 염소로(鹽所路)가 일자로 뻗어 있다. 계화에 이어 새만금간척공사로 범선이 떠있던 바다는 새로운 변모를 꿈꾸고 있다.
지금은 농공단지가 생겨 길이 사라져버렸지만 1970년대 버스노선이 생기기 전까지는 재 너머 행안면, 동진면, 계화면 사람들의 주된 도보길이었다. 향교를 드나들던 유인들, 초등학교 학생들, 읍내 관공서를 찾거나 장터꾼들이 이 길을 많이 이용했다.
고지도인 「해동지도」(海東地圖 ; 1750년대)에 계화까지 적색의 선기호로 도로가 묘사되어 있어 지금의 염소로가 오래 전에 조성된 주요 도로임을 알 수 있다.
「용동궁장토지도」(1828)는 「해동지도」의 일자 선상에 선 기호 대신 지명들이 적혀 있다. 당북하리, 당북제, 당북상리, 구지산리, 총융둔답, 총융제, 마분리(馬墳里), 염창산, 정지리(頂池里), 대벌리, 계화도(界化島)가 그 지명들이다. 처음 대하는 지명들이 섞여 있다.
지금 계화면 소재지 일대 사람들은 검암비석거리 지금의 검암교차로에서 샛길로 접어들어 당북산과 종산 사이 당고개를 거쳐 당하뒷길, 당북안산(堂北案山) 뒷길, 문래당산 뒷길, 소반재, 용화동방죽길을 거쳐 용정이나 창북에 다다랐다.
염소로 큰길에는, 용동궁장토지도의 당북상리와 당북하리 사이에 당북제(堂北堤)가 있는데 『부안읍지』(1877)에 “둘레가 4,215보로 읍의 서쪽 10리에 있다(周四千二百十五步 在邑西十里)”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인터넷 지도 상으로는 둘레 1,400미터 거리로 측정되어 보(步)는 『경국대전』 단위와 다르게 ‘한 걸음’의 보폭을 말하는 것 같다. 당상마을 쪽에 방죽목 수문이 있고 폭우가 쏟아지면 자연스럽게 빗물이 넘쳐 내려가도록 축조되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발을 치거나 쑤기 또는 그물을 대고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잡았다.


▲상술재 가는 길

「용동궁장토지도」를 보면 궁답 경계가 있고, 월암제는 용동궁장토가 이용하는데 당북제는 제방 아래 민답이 이용하는 방죽임을 알 수 있다. 방죽목 큰길이 ㄱ자로 굽어진 곳을 모통거리라고 한다. 당상리 팽나무거리와 수백 년 전 그 밑에까지 조수가 밀고 들어왔다는 너물시암과 매갈이간이 있었던 순환북로와 염소로가 만나는 교차로에 이른다.
이 교차로에서 좀 더 염소로를 타면 ‘동진개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더 뻗어 가면 옛 염소면의 중심지 대벌리에 다다르고, 우측으로는 둑길 3백 미터쯤 사이를 두고 용화동 고목나무거리와 만난다. 이 둑길 동쪽으로 당상리와 용화동 사이에 들어앉은 들을 ‘동진개’라고 한다. 당상리에서 당북제 아래 민답은 ‘방죽밑논’ 그 아래는 ‘하답’ 뒷들은 ‘동진개’라고 하였다. 「해동지도」에 적색 선인 도로와 나란히 청색선으로 묘사되어 있는 동진개도 옛날 조수가 드나들던 중요한 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진개(東眞-)는 진개(眞-)의 동쪽에 있었다

1952년 동진면 서북지구 한해대책수로사업이 있었는데 관이 주관한 것이 아니어서 공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동진개한해대책사업’ 또는 줄여서 ‘동진개사업’이라고 말했다. 당시 발대식 장면을 등굣길에 목격했는데 인상적이었다.
심한 가뭄으로 폐농이 되게 생기자 항시 저장해 놓은 보창물을 동진개 들에 대기 위해 공동작업대를 만들어 수로를 뚫고 나선 것이다. 보창이란 동진개삼거리와 고목나무길 사이에 있는 둑길에서 바다 쪽으로 조성된 넓은 저수지였다. 장비라고는 각자 들고온 삽 한 자루 뿐이었다. 이때 ‘평뜨기 정신’이란 말이 나왔다. 한국인은 알맞은 일에 사명감만 부여하면 몇 배의 능률을 올려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것이다.
2년간 가뭄으로 폐농이 되다시피 한 이 고장의 궁핍한 참상을 부안군이 원조물자 겉보리를 지원하여 이겨낼 수 있었다. 그 사업의 취지가 알려지자 호응도가 높아져 동진개를 넘어서서 양산평까지 이어졌다.
「전북일보」 ‘고향, 그리운 고향’(1990.1.25.)이라는 난에 이 사업을 소개하였는데 사업을 이끈 최봉현 고문이 편지를 보내주었다. 염소 보창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짓게 만든 수로가 양산리까지 3,980m이고 초가을에 심한 해일이 일었는데 넘치는 물이 이 도수로를 타고 따라옴으로서 피해를 막았다고 박재굉 당시 군 산업과장이 전해주어 들었다고 덧붙였다. 옛날 소금 굽던 자리로 알려진 섬배미와 너물시암 바로 밑까지도 개흙이니 조수가 드나들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지명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부안군지』(2015)에 실린 여러 고지도와 자료를 살피면서 동진개라는 지명을 다시 더듬어볼 수 있었다.
『호구총수』(1789, 정조13)라는 책자에 부안현의 면, 리명이 적혀 있는데, 동진개 조수를 끼고 있는 용화동은 꽤 큰 마을에 속하는데도 당시 면명인 일도면에서 그 지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일도면이 아니면 접경인 염소면에 해당될 터인데 거기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염소면에 생소한 지명이 나타났다.


▲「해동지도」의 염소로와 가야개·동진개 조수


▲「용동궁장토지도」(1828 ; 부안군지 2권(2015), 240쪽)


가야곶리(可也串里), 진곶리(眞串里), 교항리(橋項里)다. 『한국지명총람』(1981)에 교항리는 다리목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의 마을인데 해일이 일어 염소로 옮겨갔다고 적혀 있지만 가야곶리와 진곶리라는 지명은 처음 대하게 된 것이다.
곶(串)자가 들어간 이 두 마을의 지명은 눈을 번쩍 뜨게 하였다. 곶(串)은 육지에서 바다로 돌출한 곳을 이르는데 그 지역을 찾아낼 수 있는 단서를 붙들게 된 것이다. 궁안리의 사각지형은 염창산리로 추정되는 지금의 용정을 가로선으로, 구지산 좌측단을 세로선으로 한 구도를 위성지도에 만들어보면 그 안에 두 곶이 드러났다. 용정과 용화동 사이에 뻗어난 산줄기 하나가 있는데 가야곶(可也串), 용화동 돌출한 부분이 진곶(眞串)으로 추정되었다. 그 외에는 바다였다가 계화간척공사로 개답이 된 곳밖에 없으니 염소로 북측은 전라북도에서 조성하여 ‘도간사지’라고 했던 곳에 해당된다.
남행봉 용정이장도 “지금도 염창 공동산에서 산줄기가 뻗어 나와는 있어요.” 하고 말했다. 공동산이란 일제강점기 「묘지·화장·화장장에 관한 취체규칙」에 의해 묘지를 공동으로 쓰도록 하여 흉물스럽게 되었던 공동묘지를 말한다. 필자도 이 공동묘지에 성묘를 다닌 일이 있었다. 해방이 되자 모두들 이장해갔다.
필자가 가야곶과 진곶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리명이 명기된 『호구총수』 일도면에서 두 지명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거기에서 「용동궁장토지도」(1828)에 용화동을 마분리로 적었던 지명도 일도면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마분리란 지명으로 바뀌기 전 돌출한 부분이 염소면 진곶리(眞串里)였고 진곶 동쪽에 드나들던 조수를 동진개(東眞-)라고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상술재 초입에서 필자


▲상술재의 기억을 더듬으며 필자


▲상술재 가는 도중 부안향교를 가리키며


▲상술재를 넘어서(당상리-새봉산-계화도로 이어진다.)



진곶(眞串)은 긴 곶에서 온 말이다

동진개 한해대책사업을 소개한 김형수 당시 실무자는 염소로 가는 길과 용화동으로 가는 속칭 진배미 끝 나무다리가 있는 곳에서 착공을 했다고 적고 있다. 동네와 이 고목나무 길이 길게 뻗어있는데 ‘긴’이 구개음화되어 ‘진’이 되어 진곶이라고 하고 『호구총수』의 진곶리(眞串里)란 한자 지명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진배미란 것도 진곶의 옛 지명을 들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 궁안리와 당상리 경계(1931)

『한국지명총람』에는 당상리 용화동 난의 ‘진논’‘진배미’가 ‘긴 논’ ‘긴 배미’의 논이라고 적고 있다. ‘긴’이 구개음화되어 ‘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난히 진이 강조된 이름이 많은데 ‘진곶’ ‘진개(眞-)’도 마찬가지다.
지명 어원(조항범)에서 ‘곶’의 일반적 특성이 ‘긴 형상’을 지시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진곶’은 길다는 게 중복으로 강조되는 셈이다. 화동에서 용화동 고목나무거리까지 뻗은 긴 동네의 지형이다.
‘긴’이 구개음화로 ‘진’이 되어 한자표기로 진(眞)을 쓰고 ‘곶’을 ‘개’로 썼다고 할 수 있다. 창북리 사이에 있는 ‘화동’도 진곶을 뒷받침하는 지명으로 여겨진다. 『한국지명총람』은 꽃골(화동)[마을]이라고 적고 있다. 곶이 꽃으로 되어 꽃화(花)의 독음으로 한자표기가 되고 화동(化洞, 花洞)[마을]?꽃골이라고 하여 한자표기에 화(化)로, 『호구총수』는 화(和)를 쓰고 있어 독음과 훈음의 혼합형으로 표기되고 있다. 화상리도 곶골 위에 있어 지명을 얻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한자의 의미 이전에 순 우리말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지명이 적지 않다.
지형상 진곶 또는 가야곶으로 본다면 이곳을 진곶으로 보는 이유가 또 있다. 해동지도 및 여지도의 주기에 염소면은 초경 십리 종경 시오리다. 진곶으로 보는 용화동이 십리거리고 가야곶으로 측정되는 곳의 거리가 시오리다.


▲「용동궁장토지도」(1828 ; 부안군지 2권(2015), 240쪽) 필자가 추정하는 ‘가야곶’ 일대 지명들

동진개가 언제 개간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용동궁장토지도」에 나타나는 총융제가 용화동방죽 자리고 총융둔답이 동진개 안에 적혀 있는 것을, 이곳 지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총융청 둔은 1624(인조 2년) 관개시설·제방·도로 등을 신설 또는 조성하고, 개간되는 토지에서 세를 징수하여 군량을 준비하도록 한 것이 본청 둔전의 처음이고 부안둔(扶安屯)은 다른 둔에 비하여 벼가 월등히 많은 단일 품목인 점이 『만기요람』에 나타나 개간지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동진개 전부가 총융둔답이 아니고 민답이 섞여 있는 것을 보면 민답 일부를 둔답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소유자를 정하는 사정(査定)을 할 때 동진개의 민답은 1914년 8월 20일자로 토지조사부에 올랐는데 국(國)소유 총융둔답은 1914년 12월 1일자로 올랐다.
부안의 개간에 대한 역사는 세종대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훨씬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부안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는 가야개(可也浦)였다

가야개가 사라진 뒤 보통 염소라고 말하는 대벌리가 포구의 구실을 했다. 일제강점기 부안에서 군산으로 싣고 가는 이출할 쌀도 이곳을 이용했다. 각종 외래 어선이 염소로 입항하여 항구처럼 성시를 이루었다. 그 바람에 염소에는 매갈이에서 놀고먹는 사람, 인부 감독을 위해 아가리가 센 사람, 둥그러 먹고 사는 마당지기, 정미업 쌀장사, 중개업, 객주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김형수 구전자의 말이었다. 광복 후, 염소포구에는 몇 척의 배가 매어있거나 드나들었는데 계화간척공사로 그마저 사라졌다.
가야개가 사라지기 전, 염소가 소금 굽는 장소로서 기록이 세종 대에도 나타나지만 포구의 구실을 했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당상리 팽나무 거리에서 필자


▲동진개를 가리키며 필자


▲가야개(浦)-염창산 서남쪽 기슭에 자리한 계화면 창북리 용정마을


▲새봉산


『증보문헌비고』(1908)에는 부안(扶安)[북쪽 덕달포(德達浦) 20리, 서쪽 가야포(可也浦) 15리, 격포(格浦) 앞바다 60리]라고 적혀있다. 각 방위의 주요 지명을 포구로 들고 있는데 가장 가까운 포구로 염소가 아닌 가야개(可也浦)를 들고 있다. 거리상 가장 가까운 대표 포구 가야개는 사라졌어도 최근까지 왕개(往-)라는 혼합형 지명으로 전해져 왔다.
1930년대 당상리 큰 벌 안에서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염소와 염창산 사이에 있는 왕개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고 『부안이야기』 제9호(2013, 겨울호: 동진 당상리 마을길과 사람들)에 적은 바 있다. 구술자인 김형수에 의하면 당시 근동에서 씨름을 잘 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석희를 들었고 그를 응원하기 위해 왕개 사람들이 몰려왔다는 것이다.
내 유년의 모험은 혼자서 상술재를 넘는 부안읍내 출행이었는데 혼자서 바다에 나가 게구멍에 팔을 들이미는 일은 그 다음 단계의 모험이었다. 물때를 잘 몰라 갑자기 밀물을 만나더라도 불안감을 떨칠 수 있게 지켜주는 친구는 염소 앞 근해공원 새봉산(鳥峰山)이었다. 새봉산이라는 훈음과 독음의 혼합형 지명은 새처럼 작고 앙증맞은 모습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해 보고는 했다.
따지고 보면 가야곶이란 진곶에서 더 ‘가야’ 있는 곶이고, 진개에서 ‘더 가야’ 있는 개여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할 수 있고, 많은 지명들이 순우리말로부터 비롯되어 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동여도」(1857)의 가야포(加耶浦)란 한자 지명과 위치는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기야(可也)’는 『호구총수』(1789) 염소면 가야곶리(可也串里)가 있어 같은 지명임을 알 수 있지만, 「동여도」에 가야포(加耶浦)라고 한자 지명이 적힌 자리는 바다에 방조제를 쌓아 간척한 곳이니 곶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가야곶리가 속한 면명 염소가 두포천 반대 방위인 하서면 안에 적혀 있는 것도 큰 오류다.

/최기인(소설가)

<부안이야기 14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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