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역사/문화기행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by 부안이야기 posted Sep 27, 2016

번영만큼이나 아픔도 큰 흔적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 2016·09·27 0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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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만 가옥에서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 우리는 고장의 옛 자취와 숨결을 따라 길을 나섰다. 이 날의 탐방지는 변산반도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줄포면! 줄포는 곰소만의 어업 중심지이자 한때 우리나라의 3대 조기 어장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번창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호남평야 곡창지대의 쌀이 일본으로 수탈당하는 출구 기능을 했기에 줄포항은 상업적으로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어획량이 감소하고 토사가 축적되어 항구 기능이 점차 상실되었고, 1931년 서쪽에 새로 곰소항이 개항된 이후에 더욱 빠르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8년에는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곰소항으로 이전되었고, 급기야 1990년대에는 폐항 조치 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전성기의 줄포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제강점기에 줄포는 또 어떤 아픔들을 만났을까? 우리는 영화로운 어제들을 뒤로한 채 말없이 야위어가는 줄포 지역의 근현대 유적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탐방길 안내는 부안21 대표이신 허철희 선생님이 맡아주셨고 얼아로미 동아리 지도교사이신 김중기 선생님도 함께 하셨다.


귀중한 문화자산 속에서 뼈아픈 친일의 상처를 보다

TV가 투표 소식을 뜨겁게 토해내던 오전 내내, 하늘은 토라진 잿빛 얼굴로 굵은 빗방울을 뿌려대며 목마른 땅을 촉촉이 적셨다. 하지만 우리는 오후에는 햇살이 날 거라는 일기예보에 기대를 걸고 성큼 길을 나섰다. 읍내를 빠져나와 23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서 문득 ‘봄 들판이 참 차분하다’는 생각에 빠질 무렵 자동차가 줄포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우리의 첫 방문지는 중요민속자료 제150호로 등록되어 있는 ‘김상만 가옥’. 교하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시 걷다가 돌담으로 단장한 뜰을 만났다.
이 가옥은 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 일가가 구한말 화적떼들의 행패를 피하여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여 지은 집이다. 가옥의 주인이었던 김상만은 인촌의 장남으로 동아일보 사주를 지낸 분이다. 인촌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더욱 유명한 이 전통가옥은 꾸밈없이 높고 큰 규모에 경사도가 급한 억새지붕의 초가로 지어져 부안과 고창 지역 주거 생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채, 사랑채, 헛간채는 고종 32년(1895)에 지어졌고, 그 후로 안사랑채와 문간채 등을 추가로 지어 전체적으로 ‘ㅁ’자의 형태를 이루는데, 1982년에 가옥을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지나치게 손질하여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가옥 안내는 이 유적을 관리하시는 신복수 선생님(교하1길, 81세)께서 맡아주셨다. 선생님은 이 저택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인촌이 1915년에 인수하여 키워나간 중앙학교의 씨앗이 바로 이곳에서 잉태되었고, 훗날 3·1운동 모의가 중앙학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결과적으로 이 가옥에서 있었던 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셨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교육운동에 뜻을 품은 인촌은 이 가옥에서 친아버지 김경중과 큰아버지이자 양아버지였던 김기중에게 중앙학교 인수 계획을 밝히고 비용 마련을 상의하였으나 두 분이 반대하자 사흘 동안 물만 먹으며 단식한 끝에 결국 허락을 얻어냈고, 논 3천 두락을 팔아 비용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설립한 중앙학원 숙직실을 거점 삼아 송진우, 현상윤 등과 함께 3·1운동을 논의하였으니 이 가옥과의 인연이 어찌 뜻 깊지 않느냐는 말씀이었다. 이런 설명을 통해 우리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수년간 친일 행적을 보였다고 비판을 받는 인촌의 젊은 시절 일화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는데, 그 감회가 남달랐다.
이 가옥 옆의 저택은 인촌의 동생 김연수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 있었다는 ‘독샘’ 이야기도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옛날에 이곳을 지나가던 도사 한 분이 몹시 목이 말라 오두막집 노인에게 물을 청했더니 그 노인이 항아리에 길어둔 물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그릇에 담아주며 우리 동네는 물이 귀해서 이만큼 밖에 드릴 수 없다고 말하자 도사는 자신이 서 있던 곳을 지팡이로 탁탁 치며 이 아래에 좋은 물이 있으니 파보라 일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 키 3배 정도를 파들어 갔더니 다시 어른 키 3배 정도 직경의 큰 요강 형태 돌이 나왔는데 깊이는 어른 키의 2배 정도이고 바닥에 구멍 세 개가 뚫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두 구멍에서는 싱거운 물이 뿜어 나왔고, 나머지 하나에서는 염분이 섞인 짠물이 솟아났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이를 ‘석정 삼혈(石井 三穴)’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샘 터-김상만 가옥을 관리하는 신복수 선생이 독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독샘은 아무리 가뭄이 심할 때도 마르는 일이 없어서 줄포 시내 온 주민들이 이 물을 먹었는데, 집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새마을 사업으로 줄포에 상수도가 들어온 후 새 주인이 우물을 메웠다고 한다. 우리는 골목에 서서 그 집의 담 바깥쪽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우물 모서리 흔적을 바라보며 애틋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김상만 가옥을 돌아보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는 바로 미당 서정주 시인의 흔적이다. 미당의 부친이 인촌 일가의 마름이었기 때문에, 인촌 가족이 서울로 떠난 후 미당은 열 살 때부터 이 집에서 살며 유년기를 보냈다. 마름은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중간 관리자를 일컫는 말이다. 미당은 줄포소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기억을 훗날 작품 속에 가득 담았는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나 갈대밭 풍경, 뒷집 소녀 남숙이나 일본인 여교사 요시무라에 대한 애틋한 추억들이 미당 문학의 깊고 질긴 뿌리가 되었다는 점은 퍽 의미가 깊다. 그런데 뛰어난 시인 미당 또한 뼈아픈 친일 흔적을 남겼으니 어쨌거나 이 가옥은 줄포의 귀중한 문화자산이면서도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셈이다.


많이 벌기보다 잘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가 그 다음으로 간 곳은 서빈2 마을에 있는 ‘전도정김삼여구휼불망비(前都正金三汝救恤不忘碑)’이다. 마을의 소공원에 자리 잡은 비문에 따르면 김삼여는 부안 동중리 출신이었는데 줄포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농업, 선박업 등을 경영하여 대부호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30년 봄, 전국적으로 두 해째 큰 가뭄이 계속되고 춘궁까지 겹쳐 많은 사람이 굶어죽을 처지가 되자 백미 2,500석에 해당하는 일금 1만원을 쾌척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국내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어 만주 봉천에까지 가서 조 3천여 석을 긴급 매입하여 부안군 전체 10개 면 주민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이다.


▲김삼여구휼불망비 앞에서

김삼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백미 5,500여 석에 상당하는 채권을 포기하며 7백여 명의 채무를 면제해 주었고, 전답 10만여 평을 기증하여 공립줄포중 설립의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덕스런 행적을 기리고자 이듬해인 1931년에 주민들이 김삼여불망비를 세웠으나 일제시대와 6·25 동란을 거치면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지금은 이 소공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비석 앞에 서서 이런 이야기를 읽으니 큰돈을 벌어 아낌없이 구휼을 하고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는 그 집안이 몹시 훌륭하게 느껴졌다. 내 돈은 누구에게나 아까운 법인데,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잘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조금은 알 듯하였다.


한 가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노라니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담고 우리는 조선 후기에 부안김씨 가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김홍원과 그의 아들 김명열의 묘지가 있는 장동리로 발길을 돌렸다. 꼬불꼬불 마을길을 돌아 산기슭에 있는 김홍원 묘와 그의 재실(齋室)인 이례재(以禮齋)를 차례로 돌아보며 우리는 옛 사람과의 대화에 빠졌다. 김홍원은 줄포 포구에서 개간사업을 벌여 새로 마을을 이루기도 한 인물로, 임진왜란(1592) 때 이곳 장동리에서 군졸과 군량미를 모았고, 정유재란(1597) 때는 직접 왜적을 무찌른 공로로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던 분이다. 그는 66세가 되던 해의 병자호란(1636) 때도 창의를 도모하는 등 열의를 보였는데, 그 후로 변산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해옹(海翁)이라고 이름하며 시문을 즐겼다고 한다.


▲김홍원 묘역에서

김명열은 그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후 39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등을 지냈다. 이 가문의 문서들이 보안면 우동리에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데 ‘부안김씨종중고문서’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9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묘소 앞에서 한 가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노라니 제법 먼 옛날의 이야기인 듯 하면서도 너무 생생해서 바로 엊그제의 일인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번영만큼이나 아픔도 큰 흔적

몇 군데를 둘러보는 동안 거짓말처럼 비는 그쳤고 문득 배가 출출해졌다. 줄포에 ‘줄포 분식’이라는 아주 유명한 가게가 있어서 거기서 찐빵이랑 국수를 먹기로 했다. 3시 경에 그 집에 도착해서 주문을 하려는데 이럴 수가, 찐빵이 진즉 다 팔려서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국수만 먹었는데 그 맛도 일품이었다. 다음에 줄포에 갈 때는 꼭! 이 가게의 찐빵을 먹고 말테다! 국수를 후루룩 하고 나니 배가 든든해져서 힘찬 발걸음으로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돌아보기로 했다.
일제 강점기 줄포의 모습을 돌아보는 동안 마음이 찡했다. 번영의 폭이 컸던 만큼 아픔도 컸기 때문이었다. 당시 부안군청은 부안읍에 있었으나 부안경찰서는 줄포에 있었다. 또한 우편국, 은행 등 주요 기관 대부분이 줄포에 자리 잡고 있었을 정도로 줄포는 번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줄포의 상권은 주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장악했다. 40여 세대에 이르는 일본인들은 주로 선구(船具)점, 잡화점, 제과점을 했고, 큰 요정을 운영한 자도 있었다. 특히 조선인 점원 여럿을 거느리며 금정상점을 운영한 야스다라는 인물은 커다란 2층 건물에 상품을 가득 채워놓고 부안군, 정읍군, 고창군의 3개 군에 걸쳐 도매업을 했다. 현재 ‘줄포식당’ 자리가 그곳인데 건물의 윤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중국인도 7~8세대가 살며 요리점이나 비단, 포목 점포를 운영했다.


‘전북에서 돈 잡으려면 줄포로 가라’

줄포가 이렇게 상업적으로 번영하게 된 한복판에 ‘삼양사(三養社)’가 있다. 우리가 찾아간 삼양사 옛 터는 줄포자동차공업고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다. 옛날에는 이곳이 바다였는데 지금의 농협에서 여기까지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았기 때문에 ‘언둑거리’라고 불렀다. 삼양사의 전신인 ‘삼수사(三水社)’의 설립자는 인촌의 동생 김연수로 그는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농장경영과 간척사업을 하던 삼수사는 1931년에 삼양사로 이름을 바꾼 뒤 국내 굴지의 농장기업으로 변모했다.
오전에 내린 비로 질퍽거리는 땅을 밟으며 우리는 삼양사 옛 터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낡은 농산물 저장창고와 무성히 자란 잡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때 삼양사는 ‘전북에서 돈 잡으려면 줄포로 가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일거리가 많아서 노동자들로 북적거렸고 넓은 정미소 마당엔 곡식더미가 한가득 쌓여있었다고 한다.


▲옛 삼양사(도정공장) 터

규모가 웅장하였던 삼양사의 매가리깐(정미소)에서는 자체 소작미와 사들인 나락을 찧어 곡물검사소에서 엄격히 심사하고 등급을 매긴 후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조선미 중에도 특히 전북미는 일본인이 아주 즐겼던 쌀이었다. 쌀을 싣고 일본에 간 배가 돌아올 때는 각종 생활필수품을 실어와 판매하였으니 상업 또한 크게 활기를 띠었다. 조선식산은행 줄포 파출소와 곡물검사소는 삼양사의 이와 같은 번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들이다. 식민치하에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우리 민족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은 삼양사, 당시 경제계의 대기업 역할을 하던 그 회사가 있었던 이곳은 지금 아무런 관리 없이 쓸쓸히 터만 남아서 퍽 아쉬웠다.
삼양사를 뒤로하고 일본인들이 쌀 품질을 검사하던 곡물검사소 터를 찾아갔다. 일본인들은 각지에서 모여드는 쌀을 일등미, 이등미 등으로 구분하여 줄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해갔다. 수탈이 어찌 심했던지 조선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게 되었고, 곡물검사소에 일하는 여자들은 쌀 품질을 검사하면서 몰래 속옷에 쌀을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일을 마치면 일본인들이 속옷까지 구석구석 검사를 하며 인권을 유린하고 결국엔 도로 다 빼앗았다고 한다. 속옷에 쌀을 숨겨봤자 얼마나 숨긴다고 여자의 속옷까지 검사를 했는지 정말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하고 기억하자

줄포면사무소에 매국노로 이름 높은 이완용의 행적을 담은 비석이 보관되어 있다는 글을 떠올리며 우리는 면사무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장소로 사무소 이전을 추진하느라 분주한 직원 분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비석을 꼭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뒤뜰의 창고로 우리를 안내하셨다. ‘이완용휼민선정비(李完用恤民善政碑)’. 이완용이 우리 고장과 관련이 있었다는 게 너무 신기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매국노’와 ‘휼민 비석’이 너무 상반되는 단어들이어서 더욱 어색했다.
매국의 길을 걷기 전, 1898년에 이완용은 전라도 관찰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어느 가을밤에 갑자기 줄포에 큰 해일이 일어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잃고 인근 야산으로 피신하였으며, 줄포항의 배들은 지금의 십리동 마을과 장동리 원동 마을의 똥섬까지 밀렸다. 이 가운데에는 비단을 실은 중국 배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전라도관찰사였던 이완용은 줄포에 와서 참상을 살피고 난민 구호와 언둑거리 제방을 다시 보수하도록 하였다. 제방은 예전보다 더욱 견고하게 수리되었고 이후 일제 때 서빈들 매립공사가 이어져 오늘의 줄포 시가가 형성되었다. 이듬해 정월 부안 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사업을 기리는 비를 장승백이(현 장성동) 당산나무 아래에 세웠다.


▲이완용휼민선정비를 찾아 나서다

이 선정비가 창고 바닥에 누워있어야 하는 사연은 기구하다. 광복이 되자 매국노를 칭송하는 이 비석은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유실 위기에 처한 이 비석은 한 개인(신창근)에 의해 보관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에 당시 줄포 면장(김병기)이 이 비석을 3,000원에 구입하여 줄포면 청사 뒤편에 세워두었다. 그렇게 20여 년을 면청사 뒤편에서 사람들의 눈길도 끌지 못하던 비석은 1994년에 김영삼 정권의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에 발맞추어 또다시 철거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 이후 오늘까지 차마 버릴 수는 없어 창고 구석에 누워있게 된 것이다.
좋은 일을 하여서 세워진 비석이라기에는 여기저기 손상을 많이 입었지만 그보다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은 창고에 덩그러니 방치된 점이다. 매국의 길을 걸은 이완용의 행적을 기리는 비이기에 부숴버리자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라도 우리는 보존하고 기억해야 하며, 그래서 후대에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오날 수천 명의 부녀자가 모여들었다던

애틋한 가슴을 달래며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걷다보니 그동안 몰랐던 줄포의 역사에 상당히 다가간 느낌이었다. 발길을 후촌 마을로 돌려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가르는 마을길을 걷노라니 허철희 선생님께서 이 들판의 화려했던 옛 모습을 말씀해 주셨다.
이곳은 과거엔 바다였는데 이곳의 해수찜과 모래찜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각지에서 줄포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해수찜은 뜨거운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일종의 신경통 치료요법이다. 해안가에 움막을 짓고 콘크리트로 만든 욕탕에 바닷물을 채우고, 이 통에 빨갛게 불에 달군 돌덩이를 넣어 물을 덥힌 후 사람들은 속옷을 입은 채로 바닥에 약쑥을 깔고 목만 내놓고 누워 찜질을 했다고 한다.
매년 단오날이면 인근에서 수천 명의 부녀자가 모여들었다던 줄포 해수통은 개간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중단되었고, 지금은 논으로 변한 이곳을 사람들은 ‘해수통’, ‘해수통 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다가 너른 농토로 바뀐 것도 놀랄 일이지만, 눈앞의 이 들판에서 한때 대규모 찜질 풍경이 펼쳐졌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숱한 이야기가 우리의 발길을 붙든다

급속히 쇠락해간 줄포를 돌아보며 안타까움이 컸다. 부안자연생태공원의 언저리에서 옛 바다 쪽을 바라볼 때는 애틋한 감정마저 들었다. 바다였던 곳을 방파제로 막아 지금의 부안자연생태공원이 들어선 이후 줄포는 이제 바다 구경을 하기도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화려함 끝에 찾아온 고요함이라니......
꼬박 하루를 돌아보았는데도 줄포는 아직 숱한 이야기가 남아있다며 우리의 발길을 붙든다. 서빈마을의 젓갈시장을 비롯하여 후촌과 보안면 호암 사이 고랑에 있었다는 염막(소금 굽는 막) 터 등의 생활터전, 줄포초등학교와 중학교 등 교육시설, 장동리산성 등 역사유적도 돌아보고 싶었다. 우리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이렇게 역사의 흔적과 삶의 모습들이 가득했다는 점에 놀라면서, 우리의 게으른 태도에 대해 반성도 했다.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줄포 외에 부안군에 속한 다른 지역들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번 탐방을 통해 내 고장에 대해 더 알았다는 기쁨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도 자라났다. 하루 동안 우리의 발길을 포근하게 감싸준 소탈한 친구 줄포, 안녕.


제보해 주신 분
?신복수 선생님(1936년생, 줄포면 교하1길)
?허상균 선생님(1932년생, 줄포면 용서동)
?김문구 선생님(1932년생, 줄포면 본동)

참고자료
?문찬기 편, 『내고향 줄포』 ㈜예인미술. 2003.
?부안군 편, 『부안군지』 제1권 부안의 역사. 부안문화원. 2015.
?부안생태문화활력소 편, 『변산바람꽃』 제2호(2007)
?부안21 누리집 (http://www.buan21.com)



/강채연, 김은비, 차수진(부안여고 얼아로미)

< 부안이야기 14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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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6 부안역사/문화기행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1920~30년대 &lt;동아일보&gt;에서 찾은 기억| 2016·12·21 06:16 | ▲1980년 말에 찍은 사진으로 배말뚝 너머로 삼양사 매갈이간이 ... file 부안이야기 2017.02.07 331
765 부안생태기행 '단풍나무의 시샘’ '단풍나무의 시샘’ [2016년 11월 달력] '화살나무'| 2016·11·07 17:03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이라는 팝메뉴를 누르시... file 부안이야기 2016.11.16 272
764 부안역사/문화기행 "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 &quot;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quot; [줄포이야기2] &quot;줄포항엔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quot; | 2016·10·13 10:22 | ▲막내 동생과 줄포 집에서(1978) 과수원집 둘째 손자 줄포... file 부안이야기 2016.10.27 445
» 부안역사/문화기행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번영만큼이나 아픔도 큰 흔적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 2016·09·27 02:27 | ▲김상만 가옥에서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 우리... file 부안이야기 2016.09.27 440
762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상술재 너머 염소로와 가야개·동진개 | 2016·09·20 09:47 | ▲상술재 가는 길에서... 필자 「해동지도」에 묘사된 염소로 부안의 진산 ... file 부안이야기 2016.09.20 284
761 부안역사/문화기행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위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2016·09·12 06:32 | ▲망월봉에서 본 위도의 섬, 섬, 섬 위도(蝟島)는 고려시대 이래 부령현... file 부안이야기 2016.09.12 396
760 부안역사/문화기행 [전북일보]〈부안이야기〉 펴내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 [문화&amp;공감] 〈부안이야기〉 펴내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 '지역 역사·문화·삶, 문자로 쓰고 책으로 엮다? 기고 | desk@jjan.kr / 최종수정 : 2016.06.13 23:4... 부안이야기 2016.06.22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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