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역사/문화기행

"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

by 부안이야기 posted Oct 27, 2016
"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
[줄포이야기2] "줄포항엔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 2016·10·13 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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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동생과 줄포 집에서(1978)


과수원집 둘째 손자

줄포는 20년 가까이 고스란히 살아온, 우리 5남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집이 있는 곳. 500여 평의 땅과 4개의 방, 1개의 다락방과 별채가 하나 딸린 꽤 큰 집에서 배곯지 않고 살아온 곳이다. 북쪽으로 걸어 5분 거리가 채 안 되는 곳에 학교(줄포국민학교)가 있었고 남으로 동네를 지키는 할아버지 당산나무와 할머니 당산나무가 마주보며 마을 역사를 말하는 듯했다. 그 밑으로 샛길을 따라가다 보면 농업용수로 쓰던 대포라고 불리는 큰 방죽이 있었다. 매년 한 명씩 희생이 되었고, 우리 집 밑에 사는 생것 장수 넷째 아들이 그 방죽에 빠져 죽는 사고가 있었다. 참 좋은 형이었는데. 넋 건지기 굿도 했지만 할머니의 당부로 보러갈 엄두도 못 냈다. 동쪽엔 왕솔나무 언덕과 공동묘지가 있었고 그 밑으로 깐시암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 줄포만이 오리 넘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과수원집 둘째 손주로 통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이 각별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유년 시절을 채운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쉬지 않고 기계처럼 일했다. 봄엔 토마토 씨앗을 틔우기 위해 흙을 골랐고, 복숭아 접붙이기나 감나무 심기, 딸기 모종, 오이, 호박 심기 등으로 바쁘셨다. 당시 거름이 부족해서 뒷간 옆으로 큰 항아리를 여러 개 묻었다. 동네의 똥을 담아 놓기 위해서였다. 동네 똥이란 똥은 다 우리 집으로 모였다. 할아버진 똥지게 선수였다. 그렇게 많은 똥을 져내면서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아까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의 텃밭은 운동장처럼 넓었고 온갖 과실수들과 채전 밭의 채소들은 똥에 목마른 듯했다. “하마 내가 복성(복숭아)을 따 먹을 때까지 안 죽고 있을랑가 모르것다.”며 심은 복숭아나무들은 거의 당신보다 일찍 명을 다했다. 할아버진 나무들의 수명을 합산해서 사셨는지 아흔을 훌쩍 넘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다시 씨앗으로 가신 것이다.
마당의 봄은 화사했고 환했다. 복숭아꽃은 훗날에도 내 인생의 기억에서 항상 우선해서 피어나곤 했다. 마당과 텃밭의 경계에 꽃밭이 있었다. 20년 빨랫줄을 붙잡으며 고단했던 불임의 은행나무와 모과나무, 참빗살나무, 동백꽃, 산당화, 설토화, 키 작은 채송화, 금낭화, 옥잠화, 닭벼슬처럼 생긴 금잔화가 제 자리에서 나와 나이를 다투었다. 노깡이 19개 반이 들어간 도르레가 달린 우물과 그 옆 보리쌀을 갈던 확독이 자리를 틀었었다.


▲줄포항 부두를 바라보며(1960년대)<사진제공 라순례>

유년은 아무래도 왕솔나무 언덕에서 보냈다고 해야 옳다. 학교에서 돌아온 책가방은 방에 던져지기 일쑤였고, 발걸음은 어느새 왕솔나무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아이들이 와 있었고 꼬마치 대장이었던 복성이 형의 지휘 아래 칼싸움 총싸움 위한 준비 훈련을 하고 있었다. 언덕 밑으로 장작골로 가는 장성동 끝자락에 오줌발 겨루던 친구 성하가 살았다. 친구는 서울에서 자수성가해서 지금은 IT 업계 중소기업 사장을 하고 있다. 근방이 공동묘지여서 뼈 조각을 주워 칼 대신 쓰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배고프면 주변 밭의 무나 배추 뜽걸, 고구마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여기에서 담배도 술도 배웠다. 치기와 땅다구도.
공동묘지 밑으로 깐시암골이 있었다. 우리 밭이 두 마지기 정도 있어서 할머니 따라 밭 매러 가거나 수수 베러 간. 여름 날 깐시암골 방죽으로 멱 감으러 간 기억도 난다. 샛길 옆으로 보리밭이 많았는데 대낮에도 혼자는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문둥이가 나타나 덜컥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하도 퍼져 있었던 때여서이리라. 겨울엔 연 날리기로 날 저무는 줄 몰랐다.
이렇게 꿈같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1학년 과정이 지나자 나는 큰 도시인 전주로 전학을 가야했다. 아버지의 사업으로 어머니가 극구 이사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교편생활을 접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북 지사장(?)으로 전직을 했다. 2년의 도시 생활은 암담했다. 도시 적응이 힘들었다. 그때마다 고향 생각에 그늘이 진 담자락 밑에서 몰래 훌쩍이곤 했다. 줄포 가는 버스를 볼 때마다 타고 싶은 맘에 견딜 수가 없었다. 명절 때 고향에 가면 다시 전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했던지 다행히(?) 아버지의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그 덕에 나는 이곳 줄포에서 어렵지만 즐겁게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니 손은 쥐 손이고 내 손은 약손이다

국민학교 때 친구들과 형들을 따라 바닷가 수영과 농발게 잡기에 따라 간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아셨는지 손주를 그렇게 귀여워하시던 할머니가 그 날은 표독스런 호랑이가 되어 내 종아리를 물어뜯는 듯 때리셨다. 처음 맞는 매였다. 물가에서 놀다 죽는 사고가 종종 있었기에 할머니는 단도리를 해두고자 하신 거였다. 그 뒤로 바닷가엔 얼씬도 못했고 다 커서도 수영을 못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유년과 성년이 될 때까지 정신적 거처였다. 배가 자주 아픈 손주 배에 손을 얹으며 주문을 넣었다. “니 손은 쥐 손이고 내 손은 약손이다.” 주문이 담긴 할머니의 손길에 아픈 배는 말끔히 나았다. 여름 날 장맛비에 마당이 심하게 패어날 때도 마당 귀퉁이에 돌무더기를 물 빠지는 골에 잔뜩 쌓아서 마당 흙이 씻겨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누구에게나 겸손했고, 인자한 모습과 경우(경위)가 바른 태도는 내 삶의 나침반이 되기에 충분했다. 할머니가 환갑을 넘기고 얼마지 않아 돌아가시자 해가 사라지는 듯 세상이 어두웠다.
나의 유년은 초등학교 왕솔나무에서 즐겁던 일, 중학교 무렵 장터 구경, 고등학교 시절 포구의 기억이다.


▲줄포 집에서 할머니와 여동생과 막내동생(1979)


▲나문재가 뿌옇게 번져오면서 줄포항엔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1980년대 말 줄포항)


나문재가 뿌옇게 번져오면서
줄포항엔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삼춘들의 팔뚝 굵은 심줄로 출렁이던 물결은
안강망 어선을 싣고
칠산바다를 지우며
수평선을 지우며 사라져 갔다.
망둥어 꼴뚜기 같은 생활이라도 양식해 보려
애비들은 저마다 튼튼한 말목을 박아 보지만
말목은 갯벌에 꽂히는 것이 아니라
푸른 멍으로 출렁이는 가슴 한복판이었다.
애비들의 가슴에 그어진 어업한계선은 더욱 조여와
멀리 공동산의 무덤이 포근했다.

사람들은 제 손바닥에 드러난 뱃길을 따라
뿔뿔이 어디론가 흩어져
마을을 떠나갔다.
그물 잘 깁던 황노인도
폐경기의 창녀들도
선창가에서 밤마다 취하는 육자배기조차도

더러는 고개미 새우젓 냄새가 그리워
시린 겨울과 함께 수산시장 모퉁이에 돌아왔지만
그들의 그리움처럼 바다는 일렁이지 않았고
마른 갯벌을 질러 싱싱한 바람이 불어와
아이들은 신사당 언덕에 올라
민어처럼 날쌘 연을 날리고,

아이들의 연이 하늘 높이 차오르면
만선의 깃발을 날리던 애비들의 배들이 떠오를까
그리움이 짙어오면
물결 속으로 사라진 삼춘들이 돌아올까

날리는 눈발 속에 따리 잃은 겨울이
어둠과 함께 선창가 술병 속에서 출렁거렸고 아이들의 꿈은
해저 깊숙이 자맥질해 들어갔다.

아이들의 꿈 밖으로
긴 눈이 쌓여오고 있었다.

<졸시 ‘눈 내리는 줄포항’ 전문>


1961년생인 나는 솔직히 말하면 그 이전의 줄포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관계된 자료를 보면 얼른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포구에서 듣던 이야기나 포구 주변 풍광도 생생하지 않음을 고백해 둔다. 뒷날의 시비를 미리 막고자 하는 소리도 아니다. 내 태를 묻은 신성한 곳의 이야기를 쓰는데 더 넣지도 빼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리라.


미당의 유년의 기억, 줄포

다들 줄포는 큰 항구였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게 살았고, 이후 중국인 포목상과 음식점, 100번(당시 전화번호)집은 중국요리집으로 짜장면 면발처럼 길게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내는 중앙약방 사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약방 맞은편에 중국인 포목상 남서방집(春生德)과 주변에 말집 아들의 양복점(제일라사), 그 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웠던 친구 대옥이는 이른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신흥주점, 광주양복점, 십자당(서점), 친구 경수네 연탄가게 옆으로 대한여객 차부가 있었다. 약국 아래로는 칠성시계점, 금성관, 유구두방, 정미장원, 미광이발소, 애신제과소, 제일상회, 차부(배차장)까지 일렬횡대였다. 차부 앞에 김장순 대서소(신경림의 시 ‘폐항-줄포에서’에 등장하는), 얼굴이 갸름한 그 집 할아버지는 우리집과는 막역한 사이였고 따님이 국민학교 은사님이었다. 옆으로 남궁 성을 가진 막걸리집, 우체국, 지름(기름)집 등과 시간을 두고 다방과 당구장이 들어서면서 옛날과 오늘을 이어가고 그 건물들은 북쪽으로 있었고 제일교회도 생각난다.
조금 멀리는 줄포국민학교가 탬봉(태봉산) 밑에 자리하고 있다. 줄포국민학교는 1909년 9월 1일 개교한, 부안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학교다. 100년을 훌쩍 넘은 이 학교는 우리 또래 아버지가 다녔고 우리들을 거쳐 자녀들이 다녀서 3대가 동문인 셈이다. 여름 날 운동장에 짙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오랜 풍상을 견딘 느티나무가 역사를 말해준다. 가을 체육대회 때와 8·15 동문행사(축구대회와 씨름, 배구 경기)는 줄포의 큰 잔칫날이다. 소풍 때마다 비가 오면 학교소사가 하늘로 올라가는 이무기를 도끼로 찍어서 그 녀석이 저주를 내리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애향단을 따라 하교를 했던 일과 겨울 난방을 위해 솔방울 따러가던 일, 고무 슬리퍼로 때리던 선생님이 무서워 학교를 1년 늦게 다시 다닌 윤정이 이야기며, 똥개, 꺼꾸리, 객주집 칼도마 등의 별명을 가진 친구들도 생각난다. 학교 정문 밑으로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문방구 및 잡화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후문 앞쪽으로는 학교 점방이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햇볕 좋은 겨울날 초 6-1(담임 정배원 선생님, 1979)


▲줄포초등학교(2007. 9. 7)


약방 남으로는 숙희네 할아버지가 진맥을 했던 제원당한약방, 시계방과 우물, 서울상회, 줄포농협, 중앙철물점, 삼광당, 고창상회와 생선가게가 즐비했고, 백제약국, 양은그릇집, 삼광당 삼거리 아래로는 금은 시계방, 쌀집, 색시를 두고 술을 팔았던 군산집, 윤 씨 방앗간, 그 밑으로 박인서 씨 쌀 떡방앗간, 맞은편으로 송 씨 쌀집, 그 사이 골목으로 일본인 삼태기가 거주한 이층집에 제주에서 온 형제가 살았던 제주집이 있다. 현재 대령인 늠름한 군인 친구인 상현이네 집이기도 하다. 싸전 밑으로 건태 형네 자전차포, 영원제과, 남풍술집, 김종철 씨 이발소와
동쪽 외곽의 첫들머리인 전기회사(한국전력변전소), 그 밑 외팔이 정미소, 횟다리목을 건너 시내에서 4키로 떨어진 십리골이 있었다.
줄포의 또 다른 중심축은 장터삼거리(지금은 사거리)다. 삼거리 주위에 서울고기집과 위도상회가 있었고, 술 파는 부산집, 대성집이 이어졌다. 일명 원둑거리에는 젓갈집이 촌락을 이룬 가운데 땜쟁이(문재철 씨) 집이 기억난다. 그 길에 들어서면 새우젓, 멸치젓, 고너리젓, 황새기젓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은 광주의 치과의사인 헌덕이 형네 젓갈집 옆 우체국에 다니던 경자누나네 방도 생각난다. 걸음을 서둘러 좀더 가서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에 수당국민학교(지금 줄포자동차공업고등학교)가 자리했다. 학교 이름은 일제 때 갑부였던 김연수 씨의 호를 따서 만든 것이다. 그 옆에 큰 도정공장이 위용을 떨치고 서 있었는데 그게 오늘날 삼양사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배가 들락거리는 포구에서 보면 맵저(쌀껍질)가 태봉산만큼 쌓여 있었고 겨울엔 땔감으로 팔기도 했다. 이 때 김성수 씨 일가의 집사를 했던 시인 서정주의 부친이 고창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어 미당 시인은 줄포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게 된다. 미당은 줄포에서 지낸 유년의 기억을 바탕으로 『도깨비 난 마을이야기』(1977, 백만사)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하는 ‘자화상’을 창작했으리라 짐작된다. 삼거리 서쪽으로 지금의 성결교회 맞은편이 장터다. 1일과 6일이면 어김없이 섰던. 장터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고 주변 풍광을 기억하면, 장터 주변으로 색시집(위도집)이 어깨를 걸치고 대여섯 집이 뭇 사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줄포는 왜 시내 나간다고 했을까?

다시 중앙약방 사거리로 돌아와서 서편 모퉁이에 중앙관, 물방집, 100번집, 금강양복점, 옛 우체국자리, 석윳집, 중앙관 맞바라기에 남서방집, 영남상회, 수글이 아저씨(친구 대광이 아버지)네 쌀 트럭 도매상(줄포 최초), 줄포극장, 다리 건너, 백의원이 나란나란 붙어 있었다. 서편 길 건너에 문화의 전당 현대극장(친구 희세네 아버지가 운영)이 텔레비전이 나올 때까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할아버지 손잡고 들어간 극장 안은 모판처럼 촘촘히 사람들로 2층까지 가득 차곤 했다. 임석관석이 귀퉁이에 자리했고 영사기가 2층에서 불빛을 화면까지 내쏘았다. 불빛으로 먼지들이 날파리처럼 날아다녔다. 필름이 닳아 영화의 멀쩡한 장면에 비가 내리기도 했다. 대개는 순정만화나 스토리가 뻔한 중국 액션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잦은 정전으로 영화관은 칠흑의 어둠 속으로 빠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극장 안은 정전이 끝날 때까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야, 극장비 돌려줘!”
“꼬치(고추)씨 팔아 영화 보러 왔는디, 이게 뭐냐!”

극장을 나오면 중국영화 주인공처럼 잠시 몸이 가벼워져 발차기와 주먹이 바람을 갈랐다. 극장 바로 옆에 줄포경찰서, 좀더 가면 금련이네 쌀집과 그 앞으로 철공소가 있었다. 좀 나중에 장터 가는 길 방향으로 전주의원(친구 해성이 아버지, 후에 친구도 의사)도 들어섰다. 줄포의 행정 중심지인 면사무소 앞에 면방죽이, 양조장과 태권도장(후에 탁구장) 삼거리에 임원택네 철공소와 진식이 형네 이발소가 자리했고, 주산학원을 다니면서 “털고 놓기를 365원이요”를 반복하며 손끝으로 2급까지 따기도 했다. 용서동이란 동네에 지금도 만나고 있는 아버지가 선생님인 친구 추현이가 살았던, 가끔 가본 적이 있어 그 집 마당에 늙은 암탉처럼 쭈그리고 앉아계신 할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그려진다. 동네에 종소리가 요란했고 유치원이 들어선 줄포교회가 십자가를 매달고 있었고 주산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왼편 계단을 숨이 헐떡일 때까지 올라가면 줄포중·고등학교(지금 줄포중학교)가 나온다. 내 신발이 가장 많이 닳았던 약방 동편으로 핫도그집, 최약방, 세탁소, 기름집, 미장원, 쌀집, 바느질집, 야매치과, 말집, 6·25 때 끝발 날렸던 특무상사 출신 큰 코보, 동생 작은 코보아저씨네와 만화방, 서울이발소, 찐방집, 독시암(샘), 성결교회가 길을 따라 좌우로 있던 것을 다리 근육이 기억한다.
여기서 ‘시내’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직장 첫 근무지는 고창군 성송면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상점과 주요 행정기관이 모여 있는 곳에 나가려면 ‘소재지’ 나간다고 했다. 두 번째 근무지는 장성군 장성읍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읍내’ 나간다고 했다. 부안 역시 그렇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작은 줄포는 왜 시내 나간다고들 했을까, 궁금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줄포가 그만큼 컸었다는 방증인 셈이다. 군산 다음으로 큰 항구였고 어염업과 젓갈, 생선으로 사람들과 유흥업소가 넘쳐났고 근방(정읍, 부안, 고창)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부안경찰서와 군내에서 유일한 은행(조선식산은행 줄포지점), 부안군 곡물검사소 등 관공서가 있었기에 규모나 자금의 유통량으로 보아 ‘시(市)’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서울 가서 누구누구가 출세했다더라는 별반 관심 없었다. 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덕지덕지 껴입고 다니던 ‘미친 년’(당시 그렇게 불렀음)이 애를 낳았다는 이야기나,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쳐버렸다는 친구네 삼촌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손에 막대기를 연필처럼 들고 땅바닥을 잡기장 삼아 글씨를 쓰곤 했다. 둘은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비오기 전 꼭 나타난다는 점에서 꽤 닮았다.


▲하교하는 줄포 아이들(1960년대 추정)<사진제공 라순례>


1일과 6일은 대한민국 공식 줄포장날

항구와 장터는 맞바라기에 있었다. 1일과 6일은 대한민국 공식 줄포장날이었다. 이날은 줄포시내 사람들뿐만 아니라 근동의 소금애피, 대동, 난산, 장작골, 목하, 목상, 우포, 각동, 연정 마을 사람들과 멀리 보안면 버드내와 반평마을, 진서면의 곰소, 석포, 모항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까맣게 색칠한 나무로 밑이 텅 빈 동네 모정 같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옷가게나 잡화상, 막국수집, 농기구, 지게, 빗자루 등을 파는 곳이 얼키설키 있었고, 강아지나 병아리를 내 놓는 곳, 생선가게가 줄지었다. 포구 쪽으로 소시장이 서곤 했다. 간혹 약장수가 들어와 만병통치약, 호랑이연고나 고약, 회충약 등을 팔았다. 회충약의 절정은 직접 투약 후 열서너 살배기 엉덩이를 까고 회충을 꺼내는 장면이다. 불그레한 엉덩이 속에서 퍼진 국수가닥같이 하얀 회충이 나오는 것을 자전거 짐받이 위에서 까치발로 보았다. 엉덩이 주인공은 일 년 선배 되지만 누군지는 밝힐 수 없다. 아직은 지켜줘야 할 듯하다.
내가 본 70년대 항구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위도로 가는 여객선과 화물선을 볼 수 있었다. 멀리 갯골이 보였고 손금 같은 그 길을 따라 배는 위도가 있는 서(西)로 향했다. 화물선에 싣는 물건은 대개 미곡이나 소금, 생필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착장에 정박한 배에 물건을 싣는 장면이 흑백사진처럼 떠오른다. 육지와 배를 연결하는 폭이 그다지 넓지 않고 긴 판자는 사람들의 발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 판자는 배로 가는 길이었다. 갈쿠리로 찍은 80키로가 족히 넘어 보이는 쌀을 등에 매고 휘청거리는 판자 위를 평지 걷듯 짐을 나르는 짐꾼들의 발걸음은 경외로울 정도다. 홀몸으로 걷는 것도 오금이 저릴듯한데 커다란 짐을 지고 휘청거리는 판자 길을 파도를 타듯 오가는 구릿빛 어깨의 건장한 모습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줄포는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서해안 내륙과 산간지방에 내리는 눈은 모든 동물들의 바깥출입을 삼가게 한다.

비는 지나가자 그냥 가고
눈은 쉬어가자 마냥 오고
폭폭 발목까지
푹푹 무릎까지
내변산 봉래구곡 동짓밤처럼 깊어집니다
노루도 풍천장어도 호랑가시나무도 변산바람꽃도 겨울잠에 듭니다
변산 바다 바람에
선승들 사타구니 얼겠습니다
의상봉 쌍선봉 옥녀봉 천층봉 관음봉 하얀 빵모자 쓴 채 서로 안부 묻습니다
내소사 범종 나직나직 울립니다
층층 겹산 헐벗은 나무들 아무 탈 없으라고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외변산 해안도로
모처럼 문 닫고 쉽니다

<졸시 ‘눈 내리는 부안’ 전문>


그 많던 눈이 녹아 땅이 질척거리면 줄포는 질포가 된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들 했다. 바람이 쎈 겨울 포구는 연날리기에 최적의 입지 조건이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연자새에 실을 감고 부레를 먹이고 실이 질겨지기를 기다렸다가 사기를 먹이면 전투준비 완료다. 사기는 사금파리를 잘게 쪼개서 부레 끓인 깡통에 실을 풀고 감아내면 실에 번뜩이는 가루가 묻게 되고 손을 베게 할 정도로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잘게 부순 사기가루를 설탕인줄 알고 달게 자신(드신) 선진이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끄떡없이 가지런한 수염과 함께 무탈 장수하셨다. 하늘을 가르는 연들은 서로 싸움이 붙게 되고 둘 중 하나는 끊어지게 된다. 그 때 외쳤던 “나 가안다~ 장작고~올 호박시~일”은 귀에 쟁쟁하다. 떨어진 연은 바람을 타고 하늘을 비행하다가 낙하운동에 이른다. 아이들은 연을 주으러 대포 논바닥을 뛰어다닌다. 친구들 중에 하늘만 바라보다가 똥통 속에 빠진 구두집 아들도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끊어진 연실을 낚아채러 뛰는 내 뒷꼭지에 흙이 튀어 박혀 있을 것만 같다. 포구가 제 기능을 제대로 했을 때도 연을 그렇게 많이 날렸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항구가 시나브로 늙은 창녀의 자궁처럼 버림받고 상권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어른들의 삶이 고단해지자 아이들은 연을 날렸으리라. 아이들만 연을 날린 것은 아니다. 계문이 삼촌은 내 당숙인데 서른이 넘어서까지 연을 띄었고 연을 만드는 것이 장인 수준이었다. 방패연이 대부분이었고 색깔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 대나무를 정성들여 깎고 다섯 개의 살대를 크기와 두께를 달리해 머릿살, 장살 2개, 가운데살, 옆구리살대를 잘라진 백지에 위치에 맞게 조심스레 붙인다. 배꼽을 약간 올려야 재주를 잘 부리기에 살대 밑에 깍쟁이를 놓고 살짝 눌러주며 만드는 것이 제격이다. 시험 비행이 끝나야 상품으로 낼 수 있었다. 가격은 10원 정도로 기억되고 가장 많이 팔았던 사람은 금동의 영환이 형이었다. 연을 잘 띄었던 사람은 동네를 대표해서 다른 지역으로 연싸움을 나갔는데 그걸 당시에 ‘난질나간다’고 했다. 이후 여러 지역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해서 줄포 특유의 토속말로 알고 있었는데 엄연히 국어사전에 ‘연싸움에 도전하다’라는 뜻으로 등재되어 있다.


인생은 짧고 고향은 영원하다

부안에서 해지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최고로 치라면 월명암의 낙조대를 들겠고 둘째로는 솔섬 너머로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해양 수련원이겠다. 다음으로 줄포 선창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붉은 해가 뉘엿뉘엿 서녘 하늘로 빨려 들어갈 때 해 지는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뛰던, 마치 떨어지는 해를 잡으려는 듯 달려가는 내 모습을 지금 낡은 영사기를 통해 보는 듯하다. 장엄하게 하루를 마치는 해는 가슴 속에 늘 그리움처럼 남아 있다. 거대한 마침점인 해는 끝까지 제 지는 모습을 쉬 보여주지 않는다.
해가 잠자러 가면 선창가는 깨어난다. 불그스레한 불이 하나 둘 켜지고 사내들의 발걸음 소리에 술잔이 채워지고 노래도 장단을 찾는다.
후촌 해수통 근처에 진외갓집 할아버지의 논이 있었고 노인 양반이 마음속에 담아놓은 선영(先塋)감으로 점찍어 놓은 밭을 누님 되는 할머니가 샀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묻힐 곳이라 여기고 노상 그곳에 머물면서 나무를 심고 밭을 일구었다. 그리고는 당신 선대들의 유골을 옮겨 위쪽에서부터 차례로 모셨다. 생전에 당신 헛묘도 만들어놓고 조끼주머니 속에 꼬불쳐 모은 돈을 털어 선대들의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헛묘 곁에 할머니가 먼저 가셨고 오랜 시간을 두고 당신이 자리를 차지했다. 성묘를 갈 때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푹 꺼진 산자락을 가리키며 인공(인민공화국) 때 무수한 사람이 무고한 떼 죽임을 당한 곳이라 했다.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현장, 40고라당(2002년 10월 15일 고 김영권, 고 허영철 선생과 함께)

철이 들어 월급봉투를 매만질 때쯤에야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전국적으로 자행되었던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줄포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2002년 10월 15일에 이 사건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과 장소를 확인하러 간 적이 있었다. 한 분은 군당 부위원장 연락병이었던 당시 19세였던 고 김영권 선생, 다른 한 분은 백산면책이었던 고 고산 정진석 선생, 또 다른 한 분은 부안군 인민위원장이었던 고 역정 허영철 선생이었다. 이 자리에 허철희 선생도 함께 있었다. 세 분에게는 내키지 않는 확인이었으리라. 그러나 주저하지 않았고 뚜벅뚜벅 학살의 현장에 다가가고자 했다. 그분들만큼 그곳에 대해 알 수 있는 이가 없을 것이다. 순서대로 연락병 김 선생은 그 지역에서 불과 오 리도 안 되는 곳이 집이었고, 면책인 고산 선생은 사건 3일 후 시체를 수습하러 온 분이고, 위원장인 역정 선생도 보안면 출신으로 집이 그곳에서 멀지 않았고, 누구보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산 선생의 회고로는 3일이 지났건만 이미 시체에는 구더기가 슬 정도로 부패가 심했다고 한다. 7월 20일 경은 한 여름이었다. 정확히는 1950년 7월 20일이 부안의 첫들머리인 백산에 인민군이 들이닥친 날이기에 그 전날인 19일 밤으로 추정된다. 고산 선생의 자성록 『옳고 그름을 떠나서』(2002, 도서출판 밝)의 편집을 맡았고, 역정 선생의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2006, 도서출판 보리)의 자료와 구술 정리를 했던 나로서는 이 장소의 역사성에 깊은 관심을 갖는 터였다(세 분은 이미 유명을 달리하였고 이 기회를 빌어 영혼의 안식을 빈다). 후촌의 야산 어느 곳(지금의 농공단지에서 생태공원 가는 길로 쓰레기 매립장에서 약 300미터나 되짚어 오는 곳 근처)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강산도 다섯 번은 변했을 터다. 마침 동네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환갑이 훨씬 넘어 보이는 농꾼이었다.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해질 녘이면 으스스하고 무서워서 접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을 두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시신을 수습해 간 적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의견이 모아졌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야산 골짜기였다. 그곳에서 40명의 생목숨이 학살을 당했던 곳이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는 41명이었는데 한 명이 살아남아 ‘40고라당’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역사의 현장은 말이 없었고 역사의 상흔만 남았을 뿐이다.
여름 날 밤 모깃불을 태우고 해지름 때부터 서둘러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방망이로 두들기며 가래를 만들고 팥을 끓인다. 마당의 더운 기운이 여전한데도 화덕에 솥을 걸고 할머니와 어머니, 진외갓집 귀례아짐이 풀무질과 부채질을 연신 해가며 땀인지 눈물인지 훔쳐내며 팥죽을 쑤어 평상 위에서 온 식구들이 낭화(팥죽)를 먹던 추억의 맛은 여태 맛본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었다. 식후 부른 배를 하늘로 하고 평상에서 개 짖는 소리 아득해지고 북두칠성과 북극성, 개밥바라기, 견우성과 직녀성, 은하수를 보며 아스라이 잠들던 어린 날은 행복지수의 정점이었으리. 인생은 짧고 고향은 영원하다.

/이용범(시인, 백산고 교사)

<부안이야기 14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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