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역사/문화기행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by 부안이야기 posted Feb 07, 2017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1920~30년대 <동아일보>에서 찾은 기억
| 2016·12·21 0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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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말에 찍은 사진으로 배말뚝 너머로 삼양사 매갈이간이 보인다.


신문기사 속의 역사 퍼즐

오늘의 줄포는 평범하다. 한때는 번성했다. 줄포항이라는 이름으로. 줄포항은 줄포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지만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젠 흔적조차 없다.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20~30년대의 줄포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새로운 이야기이다.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그 뒤 20년 동안 대략 400건 정도의 줄포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엄청난 양이다. 줄포와 인연이 있는 김성수가 설립자이기도 하거니와 당시 줄포항의 위상 때문이기도 하겠다. 당시 줄포항의 사회와 문화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정보적 가치로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나마 잃어버린 기억들을 더듬어 보는 하나의 단편들이 될 것이다. 그 단편들을 통해, 줄포의 1920~30년대 역사 퍼즐을 극히 제한된 부분들로나마 맞춰보고자 한다.
건선면에서 줄포면으로 개칭된 것은 1931년 7월 7일의 일이다. 1920년 4월에 창간된 이래 <동아일보> 기사에서 특이한 것은 ‘건선면’이 아니라 ‘줄포항’으로 호명하였고 줄포를 표기할 때도 부안군을 앞세우지 않고 ‘전북 줄포’로 표기했다는 점이다. 마치 지금의 곰소가 진서면에 속해 있지만 ‘곰소’로 더 잘 알려진 것처럼. 이처럼 줄포항은 당시에 대단히 큰 항구 역할을 하였으며, 그러나 1930년대부터는 그 대안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인접지역에 곰소항이라는 신항이 모색되면서 이미 퇴보의 길을 예고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기사는 줄포항에서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약탈과 조선인 탄압 등은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미곡수출의 상황에 대해서도 아무런 보도가 없다.


▲1920년대 줄포농장(삼양사 매갈이간)


청년 활동과 줄포경신청년회

줄포에 관한 최초의 기사는 1920년 9월 5일자에서 나타난다. 줄포경신청년회(茁浦庚申靑年會)의 8월 29일 창립총회 소식을 알린다. 경신청년회는 같은 해 4월에 창립한 <동아일보>의 대표 김성수 혹은 그 양부 김기중(1859~1933, 막대한 재산 소유자로 1909년 줄포에 영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 힘씀)의 활동과 관련 있어 보인다. 신문은 “전북 줄포항은 호남의 주요지라 인번물성(人繁物盛)하되 청년의 기관이 무(無)하야 대개 안일과 고식의 폐풍(弊風)을 개혁지 못하야 용감한 정신이 핍소한지라 차(此)를 개탄하든” 몇몇의 발기로 창립했음을 알린다. 이 날은 비가 왔음에도 수백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김성수가 축사를 했다. 9월 19일자는 당시 <동아일보> 주간 장덕수의 강연 소식도 전한다.
1921년 5월 22일자는 경신청년회가 신파문예경신단을 조직했다고 보도한다. “지방의 풍기를 교정하고 풍자적 문화운동을 선전하기 위하여”라는 것이다. 또한 노동계급의 지식을 보급하기 위하여 노동야학을 설립하니 입학자가 5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기부 등의 형태로 후원한 사람들이 김경중(김성수의 친부), 김기중(김성수의 큰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이다. 경신청년회는 ‘줄포군’(茁浦軍)이라는 이름으로 축구단 활동도 한다. 1921년 6월 18일자는 고부청년회운동단과 줄포운동장에서 시합대전을 벌이는데, 수천의 관람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오후 7시까지 미결의 승부전을 벌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줄포를 비롯하여 부안, 고부, 고창 등 인근지역에서도 (소년 혹은 청년) 축구단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는 기사들이 종종 있다.
1921년 8월 8일자는 경신청년회 주최의 강연회 소식도 전한다. 1923년 1월 21일자는 서울의 유학생과 보통학교생의 연격을 도모코자 줄포삼육단(三育團)이 조직되었다고 보도하고 이후 줄포삼육단의 음악회 활동 등을 전한다.
1923년 10월 9일자는 ‘소녀해방운동’을 목적으로 줄포여자학우회가 결성되었다고 전한다. 발기인은 줄포공립보통학교의 여훈도 고목정자(高木靜子) 씨와 교원 신현근 씨 및 지역유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1920년대 초반 줄포의 청년 활동은 문화운동단체로서 다양한 활동을 주도한 줄포경신청년회에 의해서 주도된 것으로 보인다. 1924년 5월 29일자는 줄포극장이 마술공연을 한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줄포에 극장이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 4월 3일자는 줄포에서 무산녀자의 ‘문맹병자’를 퇴치하는 야학기관을 설립하고자 신춘 음악가극제를 개최한다고 보도하였다. 기독청년회가 주최하고 줄포청년회급상우회가 후원한다고 밝혔다.


▲줄포경신청년회 창립총회 기사(동아일보 1920년 9월 5일자)


파업과 시위운동

1921년 3월 28일자는 전국에 합계 44개의 조합이 있는 도시금융조합이 줄포에도 설립을 준비 중이라고 보도한다. 1924년 6월 11일자는 줄포노동조합 창립총회를 했으며 “적색의 노동기를 선두에 세우고 수백의 조합원은 노동가를 고창하며 시내를 일주” 했다고 보도한다. 1925년 9월 27일자는 건선면과 보안면에서 줄포죽림조합을 창립했다고 보도한다. 1927년 6월 6일자는 줄포항에 있는 조선인 상업자 40여 명이 줄포상우회(商友會) 창립총회를 하였다고 보도한다.
1927년 6월 27일자는 줄포항에 있는 줄포정미소 곡간꾼 전부가 동맹파업을 했다고 보도한다. 파업 사유는 쌀 한 가마당 삯을 감하였고 등외검사미에 대해서는 아예 지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1927년 12월 13일자는 만주재주조선인 압박 문제를 보도한다. 줄포의 시내노동조합 사무소에서 7개 단체 대표 20여 명이 모여 중국 관헌이 재만동포를 무리하게 폭압하는 사태에 대하여 선후책을 강구하고 시민대회를 열어 선전삐라를 배부하고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부안, 정읍, 논산, 천안, 원산, 김천 등지에서 대책을 강구하는 결의가 진행되었는데, 특히 천안의 경우 천안 ‘군민’, 천안 ‘군민대회’라 표현하는 데 반해 줄포는 ‘시민’, ‘시민대회’로 표현하였다.


▲줄포상조회 정조총회 개최 기사(동아일보 1933년 2월 17일자)


줄포공립보통학교와 취학아동 급감

1921년 5월 22일자는 줄포공립보통학교의 증축 기사를 싣는다. 기사는 “설립한 지 14년간에 항시 입학자의 영성(零星)으로 유감불선(遺憾不?)이려니 만근 향학심이 비등하야 교육이란 오인(吾人)의 의식이 사활판단의 중요 문제됨을 자각하야 금춘 신학기를 제하야 입학 희망자 근 삼백 명”이라고 한다. 또 같은 날 기사는 “여자 교육이 동양의 급무”라 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50명의 여학생 응모자를 받아 여학부를 신설하였다는 소식을 전한다.
1927년 6월 22일자는 줄포공립보통학교 2학년 교실 2개가 새벽에 불이나 전소되었다고 보도한다. 숙직자가 불을 발견하여 경찰서와 소방소에 전화를 걸었으나 우편소에서 교환을 해주지 않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전소되었다는 것이다. 피해액 5천여 원이다. 6월 30일자는 부안공립보통학교 학생일동이 15원 동정했다고 보도한다. 7월 17일자는 실화된 학교 개축 문제로 건선면 유지회를 열어 전라북도 당국이 3천여 원을 보조한다는 보고와 함께 제반의 선후책을 강구하기 위해 면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고 보도한다. 군수의 무성의와 무책임을 토의하였으나 임석한 경관이 제지했다. 7월 25일자는 긴급 면협의원회를 개최하여 호세등급(戶稅等級)에 의하여 의연금을 징수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1932년 5월 17일자는 농촌 불황으로 취학아동이 급감했다고 한다. 한동안은 모집 정원의 3~5배나 초과되어 입학난에 직면했던 부안군내 6개 공립보통학교들이 모집 정원에 미달했다. 줄포보교는 70명 모집정원에 모집인원 56명이었다고. 그러나 1933년 4월 5일자는 부안군내 6개 공보교 해당면의 학령아동이 15,222명에 취학아동이 370명에 불과, 줄포는 학령아동이 1,795명에 취학아동이 70명이라고 보도한다.
1935년 12월 17일자는 줄포보교는 재적학생 500명 정도이며 총 6학급이어서 매년 신입학기 지원아동이 많아 학급수를 늘리도록 학무위원과 유지가 군 당국에 진정했다고 한다.


▲줄포공립보통학교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5년 12월 17일자)


모루히네 중독 단속

1920년대 초에는 모루히네(모르핀, 아편의 주성분이 되는 알칼로이드) 중독자가 많았다. 1922년 2월 26일자는 “근래 호남지방에는 ‘모루히네’나 ‘코카인’을 주사하야 만성으로 중독되는 사람이 만흔데 이러한 사람의 거의 전부는 그 디방에서 상당한 신분이 잇는 사람이나 장래에 유망한 청년으로 뜻 잇는 사람들은 이러한 폐풍을 지금에 막지 아니하면 멀지 아니한 장래에 참혹한 해독이 한량업시 미치리라 하야 모루히네와 코카인의 엄중한 단속이 시급히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민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고 정작 단속할 책임이 있는 경찰은 매우 냉담하여 불평이 있던 차, 줄포경찰서장 광뢰정장(廣瀨呈藏) 씨가 경찰과 민간의 힘을 합하여 폐해를 막고자 부안군 모루히네 중독자 초멸기성회(剿滅期成會)를 조직하였다고 보도한다. 초멸기성회의 할 일은 1)치료 자력이 없는 중독자에게는 치료비 제공, 2)모루히네와 코카인 비밀 판매자 검거를 위해 신고자에게 포상, 3)새로운 중독자에게는 절교하여 배척할 것, 4) 모루히네 중독이 두려운 일임을 일반에게 알릴 것 등이다.
이후 6월 28일자 기사는 초멸기성회의 성과로 중독자 2~3인은 타처로 격리하여 치료 중이고 그 외는 거의 다 초멸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1927년 5월 28일자는 줄포에 사는 김권삼(36) 씨가 모히 중독자로서 여섯 번째 처벌을 받게 되어 줄포경찰서에 구류 중 목을 매어 자살했다 한다. 1931년 4월 1일자는 모히 환자를 근절하고자 전북경찰부가 도내 10개 지역에 치료소를 설치하는데, 줄포도 그 하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줄포경찰서장 광뢰정장을 칭송하며 주목하였다. 1922년 2월 26일자 기사에서는 이런 일을 하는 광뢰정장을 “경찰서장 중에 희한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6월 28일자에서는 “당지에 부임한 이래 다대한 공헌이 유한 바 관료식을 타파하고 평민제를 실행하야 민간의 간고(艱苦)를 문(問)하며 농촌의 계발을 도할 뿐 아니라 ... 경제교육 산업 등에 관한 열변을 토하야 일반에게 호감을 여(與)하얏스며”라고 쓰고 있다.
1928년 12월 3일자는 전 조선에서 전북 지방이 학질 보균자가 가장 많다고 하여 전북도청에서 남원, 부안, 줄포, 고창 등지를 조사하였는데 도내 총인구의 4%가 학질 보균자라고 보도한다.


▲모루히네 중독 단속(동아일보 1922년 2월 26일자)


정읍과 줄포 간 철도부설운동

1923년 4월 12일 기사에서는 전라북도 평의회가 도내 서부를 통과하는 해안선 도로 즉, 충남 강경에서부터 군산, 만경, 부안, 줄포, 무장을 경유하여 전남 법성포에 이르는 도로를 이등도로로 편입하는 건의안을 통과시켰다고 전한다. 또 같은 해 11월 15일자는 부안군수가 줄포산내선 삼등도로 공사를 착수하게 했다고 보도한다. 1924년 1월 15일자는 전북 평의회 곡물검사소가 줄포와 신태인에 있는데 농민 편의를 위해 줄포 검사소를 부안에 이전하든지 신설하든지 하는 논란이 있다고 보도하였다.
1924년 3월 13일자는 줄포항에 총독부 식산국 토지개양과 기본조사 제3반출장소를 신설하고 부안 고창 정읍의 토지개량 기본조사에 착수하였다고 전한다. 1927년 7월 7일자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줄포만 천오백정보의 간척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1927년 8월 18일자는 정읍과 줄포 간 철도부설운동을 전한다. 전북철도가 국유화됨에 따라 궤도를 확대하게 되어 당시의 궤도차륜은 폐기하게 되어 이 기회에 정읍~줄포 간 철도 부설을 도당국과 총독부 당국에 진정하기 위해 정읍에 기성회(期成會)가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8월 28일자는 줄포에서도 경철운동을 제안하는 기성회가 조직되었다고 보도한다.
1928년 8월 17일자는 줄포항 앞의 간석지 대부권 문제를 전한다. 줄포항 앞에 광대한 간석지가 있어 대정 10년 1월 8일에 전주에 사는 일본인 전중광정(田中光政) 씨가 간석지 대부허가를 받은 후 8년이 지나도록 허송세월로 사업을 착수하지 못하니 지상정무총감의 줄포 방문을 기회로 줄포의 유지가 대부허가 취소운동을 하고자 진정서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유지 10여 명이 발기인대회를 하고 면민대회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동아일보> 기자는 8월 19일자 논단에서 “줄포지방을 위하야 적지 안흔 문제라고 하지 안흘 수 업다. ... 이것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다만 일 줄포지방만이 아니라 호남의 일 요항(要港)을 영위함에 잇서서 등한시할 수 업는 중대문제라 하겟스며 딸하서 일 개인의 사정 내지 이해득실로 운위할 바가 아닌 것은 췌언할 필요도 업슬 것이다”며 간석지를 건선면의 면영(面營)으로 하여 일반면민의 이익을 도모토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32년 8월 6일자는 다년의 문제로 되어 있는 줄포만 간척사업이 동척에서 인수해 동척기술고문이 현지답사를 해 계획을 구체화했다고 보도한다.
1935년 8월 9일자는 전북도지사가 24만원 공사비로 줄포항, 동호항 개수공사하겠다고 국고원조금을 요구했다고 보도한다. “수산업으로써 전북도가 가장 만흔 긔대를 가지고 잇으면서도 어항설명로는 군산항과 어청도밖에 없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줄포항과 동호는 오히려 어항으로써 퇴보되는 현상으로 항내 수심은 갈수록 여터가서 해지방주민의 진정을 여러 번 받은 전북도 당국에서는 줄포항은 본보에 누보된 것과 같이 동만 내 웅연도의 천연적으로 수심한 것을 이용하야 14만원의 총공사비로 항만 신설할 것을 게획하고 대장성의 양해를 구한 바 동호 역시 항만시설이 불충분하야 총공사비 10만원으로 방파제 150미 부교(浮橋) 일대 토지 3천 평방에 매립할 것을 게획하고 수일내로 전북도지사가 상경하야 국고원조금을 요구하라는 바 대장성에서도 양해하는 것인 만큼 각 방면으로 실현될 것이 긔대된다고 한다.”
1935년 9월 21일자는 군산환성(群山丸星) 지점에서는 줄포항을 직이출항으로 계획 중이라고 보도한다. 조선우선회사와 줄포항 하류 웅연도로 정기입항하기로 계약 맺고 화물창고를 건설 중이라는 것이다. 줄포기항 허가 나면 일본 내지로 직송하므로 지금까지 군산을 거쳐 미곡을 이출하던 것이 부안, 김제, 정읍, 고창 방면은 줄포항으로부터 직송된다는 것이다. 생산자에게 이익이나 군산항의 해운업에 타격이 클 거라고 우려한다.
1935년 12월 12일자는 신태인역에서 줄포항 거리(5리)는 관계지방의 산업개발상 중요도로임에도 시설이 불완전하여, 지방 유력자들의 노력으로 도로개설기성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태인-영원간 3리는 부지 기부와 주민들의 부역으로 도로 완성, 영원-줄포간 2리는 2만원의 비용이 더 필요하나 주민 부담이 크므로 3개 면장이 경비의 70%를 보조하도록 도에 진정하였다고 한다.


▲정읍과 줄포간 철도부설운동(동아일보 1932년 7월 23일자)


1930년 초의 가뭄, 기근, 대홍수

1930년 3월 13일자는 줄포에 두해 동안의 한해 피해로 춘궁에 걸식군이 급증하여 김삼여 씨가 현금 1만원을 연출했다는 소식이다. 부안 전군 10개면 궁인을 구제했다. 이에 4개 면장이 합동으로 구제민 성금 2백 원으로 줄포면사무소 정문에 김삼여 씨 구휼비를 건립하였다. 기사는 “황정미(黃精米) 밥도 먹지 못하는 한해(旱害) 이재민은 품팔이 할 곳도 업서 남부녀대로 유리하야 줄포 등지로 유리군이 운집되어 조석으로 대혼잡을 일운다는데 닥처오는 춘궁에 걸식군이 격증함”이라고 보도한다.
1932년 6월 1일자는 줄포면내 900여 명의 기근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줄포면장이 구제금품을 모집하여 수수를 분급하였다고 전한다. 6월 9일자는 줄포항의 신세원 씨가 호세 부가호수 1403호 중 극빈자 585호의 세액 198원 90전을 독담 대납하여 칭송이 자자하다고 한다.
1932년 7월 23일자는 극심한 가뭄으로 면 당국이 제2차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날이 장날인지라 시장을 장동리로 옮겨 비오기를 기도하였으며 밤에는 장동 뒷산 상봉에 나무를 모아 불을 지르고 농악기를 울리며 성대하게 기우제를 거행했다.
1932년 8월 6일자는 이렇게 보도한다. “줄포지방은 근년 희유의 살인적 한발로 인하야 이앙한 것이며 전 작물은 태반이 고사지경, 사람은 더위에 시달려 죽을 지경, 음료수까지 곤난으로 인심은 날로 강하야지는 중 8월 2일 오후 8시경부터 비가 나리기 시작하야 나리다 마다 하드니 3일 오후 6시경부터는 게속 강우 중으로 농작물 사람할 것 업시 초열지옥을 버서난듯이 새 긔운을 어더 인심은 금시에 회복된 듯하다.”
1933년 5월 7일자는 3월말 현재 부안군내 총인구 81,666명에 궁민 수(窮民數)가 44,416명, 걸식자 수가 514명이고, 줄포는 궁민 수 2,800명, 걸식자 수 9명이라고 보도한다.
1934년 8월 14일자는 홍수로 150호가 침수되어 교통이 두절되었고, 8월 17일자는 “줄포 대홍수”를 보도한다. “지난 8월 12일 호우가 폭주하고 배수문은 협착하여 배수는 빠르지 못한데 때마침 만조 때라 해륙수가 상충하야 불시에 대홍수를 연출한 바 거번 홍수의 3배 이상 150호의 침수가옥을 내엇다고 한다. 이에 면, 경찰, 본사지국, 전북지국, 노동조합(면), 경찰, 본사지국전북지국, 노동조합은 구제에 활동하야 밥을 지어 이재민에게 배급하는 등 적극 노력하엿으며 이 참상에 유지 제씨는 구제금품을 연출하엿다고 한다. 일반주민은 배수문 협착한데 비난이 자자하야 수문 확장을 요구한다는데 종전의 수문으론 종종 홍수난은 면치 못하리라 한다.”
1935년 8월 27일자는 부안에 한재(旱災)로 이재민 42,525명이 발생했다고 호남순방 특파원 보도한다. 대흉작이 예상된다고 했다. 줄포의 경우 호수 1,054호, 이재민 농가호수 630호, 이재민 인구 2,300명이라고.


▲줄포 기우제 기사(동아일보 1922년 2월 26일자)


▲줄포모내기단(동아일보 1933년 6월 19일자)



면화와 부안굴비

1932년 10월 13일자는 부안군의 면화공동판매소를 줄포와 산내 두 곳에 설치하였다고 보도한다. 출하 물량이 줄포 10만근, 산내 5만근 예상한다고 했다.
1933년 4월 5일자는 수년 내로 갑자기 명성이 높아진 부안 해태를 보도한다. 1차 채취량이 5만매(500원)였고, 2차 채취량은 5~8만매로 예상한다고. 변산어조에서 검사를 마쳐 공동판매를 하게 되는데 중요 판로가 줄포, 정읍, 김제라고.
1935년 7월 27일자는 1934년 12월말 현재 부안군 전농가호수 13,850호 중 자작농 346호, 자작 겸 소작농 2,027호, 소작농 10,064호라 하고, 줄포는 자작농 32호, 자작 겸 소작농 145호, 소작농 867호이라며. 자작농은 점점 감소한다고 한다. 1937년 6월 12일자는 1936년 12월말 현재 부안군 전농가호수 15,474호 중 자작농 396호, 자작 겸 소작농 2,021호, 소작농 11,198호이고, 줄포는 자작농 37호, 자작 겸 소작농 139호, 소작농 1,559호라고 전한다.
1936년 1월 31일자는 전 조선에 굴지하는 특산품으로 굴비는 황해도 연평산이 있으나 양질에 있어서 부안굴비에 비할 바 못된다고 보도한다. 부안굴비는 칠산바다 원산지로 줄포에서 제조하며 연산수량이 133,150kg, 연산액 24,030원, 집산액 20만원이다. 종사인구는 줄포 36호 828명 중 여자 45명이다. 판매로는 전 조선 방방곡곡이라고. 기사는 “부안산굴비가 명성이 높은 것은 산액도 상당할 뿐만 아니라 품질이 연평산에 비하야 우량하야 살이 두터워서 맛이 잇고 거죽이 열버서 양이 만타고 한다”고 보도한다.


▲부안굴비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6년 1월 31일자)


1930년 전후의 사건 풍경

1924년 5월 23일자는 오성국의 며느리 이성녀(18)는 작년에 시집온 뒤로 부부의 사이가 남달리 다정하야 이래 자미잇게 살아오든 바 지난 19일 오후 세시반 경에 돌연히 그 여자는 자긔집 고깐에서 목을 매어 세상을 저버렸는데,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보도한다.
1932년 5월 4일자는 21살의 줄포 사는 총각이 복어알을 먹고 죽었다고 전한다. 같은 해 5월 19일자는 줄포항 해안에서 40세 가량 되며 남원 사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외지인이 복어알을 먹고 “비참히도 죽엇다”고.
1932년 8월 14일자는 부부가 옴으로 고통하든 끝에 신열병까지 발생하여 방에 수은을 피우고 치료 중 가족들이 마루의 모기에 쫒겨 방에 들어가 같이 자다가 여섯 식구가 수은중독으로 아이들 2명은 죽고 부부와 아이 4명은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1932년 12월 4일자는 23살의 소부(少婦)가 개가하여 6~7년 동거하던 남편이 새 장가든다는 말에 신세를 비관하여 양잿물을 마시고 위독하다고 보도한다. 당시 기사는 “양재물을 마시고 고민한다”고 표현했다. 1920년대부터 어린아이가 마루에 있는 양재물을 먹고 죽는 등 당시 양재물은 목숨을 앗아가곤 했다.
1932년 4월 20일자는 줄포이발관 안방에 강도가 침입했다고 신고가 접수되어 경찰서장 이하 총출동하였는데 허위신고로 밝혀져 신고자를 구류 15일에 처했다고 보도한다. 남편이 없는 사이에 남편의 외출을 방지하고자 아내가 허위신고를 했다 한다.
1932년 8월 27일자는 중국인 우동집에 절도가 침입하여 백미 세말 훔쳐갔고, 자전거포에 침입하여 자전거 부속품 원가 20여 원 가량어치 훔쳐갔고, 약방에 현금도난이 있었으며, 전당포는 귀금속과 현금 50여 원이 든 수제금고 절취가 있었다고 보도한다. 8월 16일자는 한 약방에 107원이 들어있는 돈궤와 3원 가량 든 손금고를 도둑맞았다고.


▲줄포 사는 총각 복어알 먹고 죽다(동아일보 1932년 5월 4일자)


1930년 전후 일상 풍경

1928년 9월 29일자는 줄포의 8월 중 한 달간 연초 소비 금액이 9,644원이라 보도한다. 해당기간 타 지역 대비해 보면 전주 25,353원, 정읍이 12,834원, 부안이 7,592원이고, 전북의 총소비액이 15만원이었다. 줄포는 도내 9번째 지역에 해당했고, 기사는 전북도의 이런 상황에 대해 “놀랠만한 이 숫자”로 제목을 뽑았다.
1929년 4월 11일자는 줄포경찰서가 부안읍내로 이전한다는 소문이 무성하다고 짤막하게 보도한다.
1930년 12월 18일자는 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퇴학을 당한 경성중앙고보생 서정주가 줄포 자택에 와 있다 고등계 형사들에게 경성으로 압송당했다고 전한다.
1931년 8월 29일자는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제1회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고자 약 4주간의 한글강습회를 하려고 한 대원이 <동아일보>의 한글 태본(台本)을 경찰당국에 제출하였으나 태본에 의문이 있다며 허가하지 않아 중지하게 되었음을 알린다.
1932년 6월 12일자는 줄포항 해안백사장 모래찜이 유명하여 2,000여 명이 모여들었다고 보도한다. “줄포항 해안백사장 모래찜은 고래로 골수병에 유익하다는 바 특히 단오 모래찜은 신효가 잇다 하여 매년 단오날이면 린군 부안 정읍 고창 등지에서 무려 수천의 부녀자가 운집케 되든 바 금년에도 여전 수천의 부녀자가 각처에서 운집하야 줄포항은 일시 부녀세계로 화하엿다 한다.”
1932년 10월 13일자는 부안군 삼림조합에서 5개년 계획의 하나로 개량온돌 분구(焚口, 아궁이)의 실행을 철저히 선전하기 위해 읍내시장과 줄포시장에 온돌개량탑과 선전판을 세웠다고 한다.
1933년 5월 4일자는 줄포항의 우편물 발송과 도착을 하루에 1회에서 2회로 증회한다고 보도한다.
1933년 5월 30일자는 줄포소방조의 주최로 줄포 매립지광장에서 40여 운동종목으로 시민 대운동회를 개최한다고 보도한다.
1934년 2월 13일자는 줄포소방조가 경찰서 내 경종대에 3마력의 사이렌을 장치하고 시보를 개시했다고 보도한다.
1937년 9월 20일자는 국방헌금 위문금 소식을, 10월 1일자는 군사강연 소식과 줄포국방부인회 활동(우동과 떡을 만들어 팔아 국방에 헌금)을 보도한다. 10월 14일자는 일반고용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줄포주재소에서 시국좌담회를 개최했다고 보도한다.


▲줄포명물 모래찜(동아일보 1932년 6월 12일자)


/고길섶(문화비평가)

< 부안이야기 14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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