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역사/문화기행

부안 김씨,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by 부안이야기 posted Feb 14, 2017
부안 김씨,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고려시대 부안 김씨 이야기
| 2017·02·06 11:57 |
bi14Hiu.jpg
▲변산면 소재지인 지서리(知西里)-예전에 조수가 드나들던 포구마을로 땅이름은 지지포(知止浦)였다. 지지포는 고려 명현 지포(止浦) 김구(金坵)가 말년에 이곳에 별서(別墅)를 짓고 후진을 가르치며 시와 거문고로 소요하였다고 하여 생성된 땅이름이다.


부안 김씨의 시조는?

부안 김씨(扶安 金氏)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김부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을 그 시조로 한다. 마의태자는 그 이름이 사서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족보 기록에서만 확인 가능한 이름이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이 935년 10월에 군신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을 논의하자,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한 인물이다. 그는 신라 사직의 보존을 강력하게 피력하였지만, 결국 경순왕 등이 고려에 항복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자, 마의태자는 통곡을 하며, 지금의 금강산인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베옷 즉 마의를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 한다. 개골산으로 표현된 것을 보면,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들어간 것은 겨울인 듯하다.
김창협(金昌協)의 『농암집(聾巖集)』에는 “(장안사 지나 극락암(極樂菴)에서) 3, 4리쯤 가자 못 하나가 있었는데, 넓이가 수백 평이고 짙푸른 색을 띨 만큼 고인 물이 깊어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비춰볼 수 있었다. 못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윗돌은 평평하고 넓어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위에 폐허가 된 성(城)이 있는데, 사람들은 신라 왕자가 은신했던 곳이라 했다. 문이 휑하니 열려 있었는데, 몸을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신라 왕자는 마의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의태자의 5세손 김경수(金景修)

부안 김씨는 이 마의태자의 5세손이라고 하는 김경수(金景修)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13대 임금인 선종(宣宗) 때 문과에 급제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춘(金春)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지자 본관을 부안으로 하였다. 부안 김씨 중 가장 이름을 떨친 김구의 신도비명에는 그 선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공의 휘는 ‘구(坵)’요. 자는 ‘차산(次山)’이다. 신라국성의 휘 ‘춘(春)’이신 ‘부령부원군’이 바로 공의 고조할아버지이다. 증조할아버지의 휘는 ‘인순(仁順)’이니 은덕(隱德)으로 벼슬하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휘는 ‘작신(作新)’으로 ‘우복야(右僕射) 겸(兼) 이부상서(吏部尙書)·부령군’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의(宜)’이니 ‘합문지후(閤門祗侯)·우복야’이시고 어머니는 나주 김씨이다.

김춘은 부령부원군이 되었다는 사실과 김인순이 은덕으로 벼슬하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은덕은 남이 모르게 베푸는 덕행을 말하는데, 이 글에서는 아마도 벼슬에 뜻이 없이 숨어 살았던 은자적인 삶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김작신은 ‘우복야 겸 이부상서·부령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사』 김구 열전을 보면, “원종(元宗) 4년(1263)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명되었는데, 김구의 조부가 승려이므로 대간(臺諫)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으나 김구가 재능이 있어 이에 (그의) 고신(告身)에 서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김작신에 관련된 내용은 조작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신도비명에는 부안 김씨가 적어도 김춘부터 중앙 관직에 임명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는 『씨족원류』를 통해 살필 수 있다. 김경수부터 김춘(金春)-김인순(金仁順)-김작신(金作辛)은 모두 호장(戶長)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작신이 승려였다는 점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호장이었다. 호장은 향리층에서 최상위를 형성한 이들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중앙 관직에 진출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김의

중앙으로 진출한 것은 김작신의 아들 김의 때부터이다. 『씨족원류』에는 김의의 옛 이름이 ‘정(挺)’ 또는 ‘정립(鼎立)’이고 부인은 나주 김씨 김윤순(金允淳)의 딸이라는 사실과 함께 신종(神宗) 갑자년 즉, 신종 7년(1204)에 병과로 과거에 급제했으며, ‘조의랑(朝議郞)·합문지후’를 지낸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 『고려사』를 참고하면, 신종 7년에는 10월에 과거가 있었는데, 그 당시 지공거는 추밀원사(樞密院使) 민공규(閔公珪)였고, 부시험관인 동지공거(同知貢擧)는 우승선(右承宣) 안유부(安有孚)였다. 이 당시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인득후(印得侯) 등 30명에게 급제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의는 족보에는 ‘정(挺)’은 ‘정립(挺立)’으로도 기재되어 있다. 그가 받은 조의랑은 정5품상의 문산계이다. 문산계는 관료의 지위와 신분을 나타낸 공적인 순서를 표시하는 관계를 말한다. 반면 그가 맡은 직책은 합문지후였다. 합문은 각문(閣門)이라고도 하는데, 조회의 의례를 관장하는 관청을 말한다. 그는 지후였는데, 고려시대에 4인을 두었으며 정7품에 해당된다. 그가 지후였음은 아들인 「김구묘지명(金坵墓誌銘)」을 통해 확인이 된다. 그 내용 가운데 “(김구의) 아버지 ‘정(挺)’은 □□ 예전의 이름난 선비로, 지후(祗侯)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 서술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고종 17년(1230)에 국학박사(國學博士)로 김정립(金挺立)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는데, 그가 고종대 활동한 사실을 감안하면, 김구의 아버지 김정립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즉 부안의 호장집안이었던 부안 김씨가 이때부터 중앙 관료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김의(김정립)의 아들 김구

부안 김씨 가운데 가장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김의(김정립)의 아들 김구였다. 김구는 희종 7년(1211)에 태어났는데, 첫 이름은 백일(百鎰)이었으며, 호는 지포(止浦)였다. 그는 성격이 진실하고 꾸밈새가 없었으며, 평소에는 말이 적었다. 하지만 국가의 일을 논의할 때만은 절실하며 극진하여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김구는 태어났을 때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을 잘 지었다.
그는 17세인 고종 14년(1227)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2세 때인 고종 19년(1232) 5월에 을과(乙科)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성균시에 합격한 후 김구는 아마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했던 듯하다. 그는 매번 하과(夏課) 때마다 동년배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하과는 선비들이 5∼6월에 시작하여 공부기간을 오십일로 한정하고, 절에 가서 옛 글과 시를 외고 또는 시와 부를 짓던 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가 과거에 장원(狀元)을 할 것이라 기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는 그만 2등으로 급제하고 말았다. 훌륭한 성적이기는 하지만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는 못한 결과였다. 스스로도 많은 실망을 했으리라.


▲지포김구선생묘역일원(止浦金坵先生墓域一圓, 전라북도기념물 제127호)



그대의 성적은 장원으로도 마땅하지만

장원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그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시험 주관의 책임을 맡았던 지공거(知貢擧) 김인경(金仁鏡)도 그를 1위로 뽑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한 데에는 그 또한 과거시험에서 2등을 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인경은 화응(和凝)과 범질(范質)이 옷을 주고받았던 고사를 빌어 김구를 위로하였다.
김인경이 거론한 화응(和凝)은 오대(五代)시절 후진(後晋)의 대신으로, 그가 과거를 맡아 볼 때에 범질(范質)을 10등으로 선발하면서, 화응이 범질을 불러, “그대의 성적은 장원으로도 마땅하지만 예전에 내가 10등으로 합격했으나, 이와 같이 대신이 되었으므로 그대에게 이 대신의 지위를 선사하기 위하여 나와 같은 10등으로 선발하였네.”라고 위로를 건넸고, 그 후 실제로 그가 말한 것처럼 범질이 정승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즉 김구가 높은 관직에 오를 자격을 갖췄으니 너무 서운해 하거나 실망하지 말라는 위로를 했던 것이다. 마음을 담은 그의 위로에 김구도 진정성을 느끼고 긴 계문(啓文)을 지어 감사 인사를 드렸다. 김구가 감사의 인사로 지은 계문은 네 글자로 된 구와 여섯 글자로 된 구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를 사용하는 변려문(騈儷文) 형식의 글이다. 그런데 그 때 김구가 지은 문장이 정교하고 간절해서 일반 사람들이 보통 뜻을 표하는 것을 훨씬 넘어섰다고 한다.


같은 고을 사람의 고발로

과거 합격 후에 그가 받은 첫 관직은 정7품의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이었다. 정원부는 평안도 구성(龜城)에 위치했다. 그런데 같은 고을 사람 황각보(黃閣寶)가 개인적으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가 그의 세계(世系)에 흠이 있음을 지적하며 해당 관리에게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김구는 위기를 맞았다. 황각보가 어떤 점을 지적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계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신분에 흠결이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김구의 할아버지가 스님이었다는 점을 걸어 그가 관직에 나온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저 쉽게 넘어갈 만한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한 고발이 들어오자 김구의 재주를 아꼈던 당시 권력자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조차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전직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최이까지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황각보의 고발사건이 단순히 무고만이 아니었을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 하지만 자료 부족으로 더 이상의 논의는 어렵다.


▲김구를 제사하는 재실 경지재(敬止齋)


제주 판관으로서

고종 21년(1234)에 제주판관으로 전보된 김구는 제주에서 당시 문장으로 이름난 최자(崔滋, 1188∼1260)를 그곳에서 만났다. 최자가 제주부사(濟州副使)로 있었던 것이다. 그 때 한번은 어떤 사람이 개경(開京)에서 제주도로 와서는 과거시험의 부제(賦題)가 ‘진(秦) 효공(孝公)이 효산(肴山)과 함곡관(函谷關)의 견고함에 의거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부(賦)는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는 한문 문체의 하나이고 부제(賦題)는 과거에서 부를 짓도록 내는 시험 제목을 이르던 말이다. 최자가 김구에게 “이 제(題)로는 부를 짓기에 어려운데, 시험 삼아 나를 위하여 하나 지어주시오.”라고 하였다. 김구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으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 후에 붓을 가져오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글을 썼는데, 점 하나 덧붙일 것이 없이 훌륭했다. 최자가 탄복하여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시부의 모범이니 너는 삼가 잘 보관하여라.”고 하였다 한다.
제주 시절과 관련해 『탐라지(耽羅志)』 풍속편에는 “김구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에게 고통을 느끼는 바를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는 서술이 있기도 하다. 제주도는 자갈이 많고 건조한 곳이어서 밀, 보리, 콩, 조 따위 만이 생산되었다. 그런데 이를 소, 말, 노루, 사슴 등이 마구 짓밟았다. 또한 힘 있는 자들이 경계가 불분명한 땅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와 백성들의 땅을 뺏는 등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이에 김구는 돌을 모아 담을 쌓게 해 경계를 분명히 해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한다.


권신, 최항을 비판하다

김구는 30세 때인 고종 27년(1240)에 내직으로 옮겼다. 그는 권직한림(權直翰林)으로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당시 다녀온 내용을 바탕으로 『북정록(北征錄)』이라는 책을 짓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한림원(翰林院)에 있은 지 8년이 지나 그는 당후(堂後)를 거쳐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고, 다시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옮겼으나, 고종 34년(1247)에는 최이의 아들 최항(崔沆)과의 불화로 좌천되기도 했다. 최항이 대승불교의 근본 경전인 『원각경(圓覺經)』을 목판에 새겨 책을 간행할 때 김구에게 책의 말미에 발행하게 된 사연을 간단하게 적는 발문(跋文)을 쓰게 했다.
이에 김구는 “벌(蜂)은 노래 부르고 나비는 춤추며 온갖 꽃이 피어나니, 이것이 찬란하면서도 감춰진 진기함을 모두 간직하였네. 종일토록 『원각경』을 읊조려 말하니, 입 다물고 남은 봄날을 지나침과 같지 않도다”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를 본 최항이 노하여 “나에게 입을 다물라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말하고 그를 좌천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포집』 연보에는 김구가 이때부터 10년 동안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해가 최항 사망 이후인 고종 44년(1257)이었는데, 이 해 윤4월에 최항이 사망하였음을 고려하면, 최항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지포에 머물다

관직에서 물러난 10년 동안 김구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연보 등에는 직접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이에 도움을 주는 것이 신도비의 다음 기록이다.

공은 부안의 선학동(仙鶴洞)에 자리 잡았다. 만년에 또 변산 바다 위에 집을 지어 그 이름을 지지포(知止浦)라 하고는 물러나 휴식하는 여가에 거문고와 책으로써 스스로 즐기며 후학들을 육성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아 엄격히 과정을 세워서 영재 육성의 효과를 힘쓰셨다.

김구가 자리를 잡았다는 선학동은 부안읍 선은리에 위치한 것으로, 지지포는 지금의 변산면 지서리를 말한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만년에 지지포에 머문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죽기 전까지 관직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지지포를 지은 것은 아마도 최항과의 불화로 인해 10여 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난 때가 아닌가 한다. 이는 그가 거주한 ‘지지포’라는 집의 이름을 통해서도 그러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다.
‘지지’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문구이다. 『대학』을 보면, “멈춤을 알고 난 이후에 안정이 있다(知止而后有定). 안정하고 난 이후에 능히 고요할 수 있다(定而后能靜). 고요하고 난 이후에 능히 편안할 수 있다(靜而后能安). 편안해지고 난 이후에 능히 사려할 수 있다(安而后能慮). 사려하고 난 이후에 능히 얻을 수 있다(慮而后能得).”고 하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즉 그에게는 멈춤을 아는 것이 안정과 연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관직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최항이 사망할 때까지 10년이나 머문 것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글귀가 아닌가 한다.
그는 그 10년 동안 거문고와 책을 읽고 후학을 기르면서 시간을 보냈으리라. 『지포집』의 연보에 “후학들을 교육하되 엄격히 과정을 세우니 한때 인재가 성하게 일어났다.”고 하는 서술이 그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라 짐작된다.

/허인욱(고려대 강사)

< 부안이야기 15호>에서 옮겨왔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카테고리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79 부안생태기행 변산 심심산골에서 만나는 '새우' 변산 심심산골에서 만나는 '새우' [2017년 5월 달력] '새우난초' | 2017·05·01 08:19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이라는 ... file 부안이야기 2017.05.10 352
778 부안역사/문화기행 '전봉준! 새벽길 나서다' '전봉준! 새벽길 나서다' 박홍규 화백의 '동학농민혁명이야기'| 2017·04·24 12:12 | ▲을미년 3월 29일(2014, 52X46) 1985 을미년 3월 29일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 file 부안이야기 2017.04.25 469
777 부안역사/문화기행 길에서 ‘부안’을 만나다 길에서 ‘부안’을 만나다 술회사 문 열리기를 천당같이 기두리고| 2017·04·19 01:12 | ▲동문안에 있는 2기의 석장승 김제 쪽에서 동진강 대교를 건너 부안읍내로 ... file 부안이야기 2017.04.25 498
776 부안역사/문화기행 백제 멸망의 진실-의자왕은 항복하지 않았다 백제 멸망의 진실-의자왕은 항복하지 않았다? | 2017·04·10 15:34 | ▲ 묘비명에 적힌 글귀, 에식진이 백제 웅천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웅진성주 배반으로 체포... file 부안이야기 2017.04.11 479
775 부안생태기행 진달래도 피고, 사스레피나무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사스레피나무도 피고... [2017년 4월 달력] '사스레피나무' | 2017·04·03 12:21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 file 부안이야기 2017.04.03 364
774 부안역사/문화기행 부여풍,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부여풍,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백제 부흥의 중심, 주류성 | 2017·03·27 09:35 | ▲우금산성(일명 주류성) 굴실-백제부흥운동때 복신이 칭병 우거했던 곳이라 ... file 부안이야기 2017.04.03 438
773 부안역사/문화기행 곰소에서 죽도를 보다 곰소에서 죽도를 보다 부안군과 고창군의 경계지, 신화와 역사의 접선지 | 2017·03·12 23:47 | ▲곰소에서 바라본 죽도 부안군과 고창군의 경계지 “어제 곰소항에... file 부안이야기 2017.03.12 472
772 부안역사/문화기행 길은 객사 앞에서 시작된다 ? 길은 객사 앞에서 시작된다 [부안읍이야기1] 부안읍성과 지킴이 신앙 | 2017·03·06 00:02 | ▲부안동문안당산(중요민속문화재 제19호) 올해는 부안(扶安) 정명(... file 부안이야기 2017.03.12 444
771 부안생태기행 “닥나무 사촌 꾸지나무 한지 원료로 쓰여” “닥나무 사촌 꾸지나무 한지 원료로 쓰여” [2017년 3월 달력] '꾸지나무' | 2017·03·02 01:36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 file 부안이야기 2017.03.02 328
770 부안역사/문화기행 부령국민학교의 해방 전후 풍경 부령국민학교의 해방 전후 풍경 해방 전후 국민학생들은 뭐하고 놀았을까 | 2017·02·27 14:44 | ▲1947년 부안공립국민학교 졸업사진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 file 부안이야기 2017.03.02 418
769 부안역사/문화기행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열 세명의 천사들이 둥지를 튼 주산중학교 | 2017·02·13 04:42 | 하나. 새로 만난 천국의 아이들 거의 20년 만에 부안으로 다시 돌... file 부안이야기 2017.02.14 295
» 부안역사/문화기행 부안 김씨,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부안 김씨,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고려시대 부안 김씨 이야기| 2017·02·06 11:57 | ▲변산면 소재지인 지서리(知西里)-예전에 조수가 드나들던 포구마을로 땅이름... file 부안이야기 2017.02.14 352
767 부안생태기행 “화살대는 도이관에서 난다” “화살대는 도이관에서 난다” [2017년 2월 달력] '이대' | 2017·02·01 00:36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이라는 팝메뉴를 ... file 부안이야기 2017.02.07 225
766 부안역사/문화기행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1920~30년대 &lt;동아일보&gt;에서 찾은 기억| 2016·12·21 06:16 | ▲1980년 말에 찍은 사진으로 배말뚝 너머로 삼양사 매갈이간이 ... file 부안이야기 2017.02.07 331
765 부안생태기행 '단풍나무의 시샘’ '단풍나무의 시샘’ [2016년 11월 달력] '화살나무'| 2016·11·07 17:03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이라는 팝메뉴를 누르시... file 부안이야기 2016.11.16 272
764 부안역사/문화기행 "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 &quot;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quot; [줄포이야기2] &quot;줄포항엔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quot; | 2016·10·13 10:22 | ▲막내 동생과 줄포 집에서(1978) 과수원집 둘째 손자 줄포... file 부안이야기 2016.10.27 445
763 부안역사/문화기행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번영만큼이나 아픔도 큰 흔적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 2016·09·27 02:27 | ▲김상만 가옥에서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 우리... file 부안이야기 2016.09.27 440
762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상술재 너머 염소로와 가야개·동진개 | 2016·09·20 09:47 | ▲상술재 가는 길에서... 필자 「해동지도」에 묘사된 염소로 부안의 진산 ... file 부안이야기 2016.09.20 284
761 부안역사/문화기행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위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2016·09·12 06:32 | ▲망월봉에서 본 위도의 섬, 섬, 섬 위도(蝟島)는 고려시대 이래 부령현... file 부안이야기 2016.09.12 396
760 부안역사/문화기행 [전북일보]〈부안이야기〉 펴내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 [문화&amp;공감] 〈부안이야기〉 펴내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 '지역 역사·문화·삶, 문자로 쓰고 책으로 엮다? 기고 | desk@jjan.kr / 최종수정 : 2016.06.13 23:4... 부안이야기 2016.06.22 40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9 Next
/ 39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