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역사/문화기행

부령국민학교의 해방 전후 풍경

by 부안이야기 posted Mar 02, 2017
부령국민학교의 해방 전후 풍경
해방 전후 국민학생들은 뭐하고 놀았을까

 

| 2017·02·27 1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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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부안공립국민학교 졸업사진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궁벽한 시골인 부안에도 해방은 지역 사회에 많은 변화와 영향을 주었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을 만나 “해방을 맞아 맨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어보면, 대개는 “뭐가 뭔지 통 몰랐어.” 혹은 “그저 기뻤지.” 하는 정도의 느낌을 얘기할 뿐이다. 필자는 부안 읍내에 있는 부령공립국민학교(현 부안초등학교, 이하 부령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작은 일상사를 통해 해방 전후를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된 지 70여년이 지나면서 지역 자료라고 할 만한 것들은 거의 사라졌다. 특히 부령국민학교는 해방 후인 1949년 4월에 학교가 불에 타면서 조그마한 자료조차 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 장의 사진조차도 발품을 팔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웠다. 이런 점에서 부령국민학교에 대한 과거의 복원은 그 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억이란 것도 정확한 것이 아니어서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환경에 따라 크게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당시 학교와 관련된 다섯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해방 전후를 떠올리고자 한다. 교사 1명(심길동1)), 6학년 2명(임방규2), 김복균3)), 5학년 2명(김형주4), 신이근5))이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이들의 기억이 갈리는 경우는 복수의 증언을 확보하여 전개하지만, 개인의 주장이라 하더라도 구체적이면 이것 또한 전개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1930년대 부령국민학교 전경(사진제공 부안초등학교)


국민학생들은 뭐하고 놀았을까

지금이나 그때나 학생들은 서로 어우러져 무엇인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쉽게는 공을 차면서 놀았다. 그때는 공조차 구하기가 어려워서 지푸라기를 동그랗게 말아서 차기 시작하면 지푸라기는 곧 풀려 너덜거렸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해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하급생들은 운동장 한편에서 흙을 가지고 놀거나 운동장에 금을 그어 놓고 이제 막 배운 일본말을 쓰면서 놀고 있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놀이하는데 적당한 공간이었고 학교에 있는 모든 것은 놀이 기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놀이에도 일본의 영향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서양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동아시아 민족을 해방시키는 해방전쟁’이라고 자신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선전하였다. 자신들이 계획한 동아시아 경제 블록 구상과 전쟁을 위해 필요한 물자를 위해 아시아 국가들을 차례로 침범하였다. 말레이시아를 점령한 일본은 그곳에서 생산되는 고무로 공을 만들어 국민 학생들에게 천황의 하사품이라고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학생들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고무공을 만질 수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생고무로 만든 공과 하얀 공 두 종류였는데 아이들은 잘 터지지 않는 생고무를 받기를 원했다. 이 공으로 시간만 나면 어디서나 편을 나누어 공을 찼다.
1943년부터는 일본 군인들이 부안에 주둔했는데6) 이들은 부령국민학교 교실에서 집단 거주를 했다. 군인들이 훈련의 일환으로 행안면 산간 평야를 포복해서 성황산을 향해 작전을 펴면 국민학생들은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구경을 했다. 추운 겨울에도 손을 호호 불어가며 군인들의 훈련 현장을 지켜보면서 자신들도 용감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가곤 했다.
아이들은 병정놀이를 했다. 두 패로 나누었는데, 숫자가 많을 때는 한 패거리가 15명이 되기도 했다. 산에 있는 솔방울을 따서 몇 개씩 나누어 가지고서 상대방에게 던져 여기에 맞는 사람이 탈락되며 이러다가 상대방의 진지를 점령하면 승리하는 놀이였다. 한 패는 성황산에서 출발하고 다른 패는 반대편 망기산에서 출발하여 서로 만나서 산에 있는 방공호를 이용하여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놀이를 벌였다. 그러다가 과열이 되면 솔방울이 아니라 돌을 상대방에게 던져 머리가 터지기도 하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1946년으로 추정되는 개암사 소풍(심길동 교사와 신병일 교사)


일본 군인들에게 교실을 빼앗기고

재미있는 놀이만 하기에는 학교생활이 결코 녹녹치 않았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1941년 12월 8일 즈음해서 부령국민학교 학생들은 무슨 기념행사나 있는 줄 알고 빈 몸으로 학교에 갔다.7)
그런데 2학년 이상 전교생에게 새끼줄을 두어 발씩을 들게 해서 강행군을 시켜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눈길을 따라 변산 산자락의 줄포 가는 고개 밑까지 이끌고 갔다. 그곳에는 집채만 한 장작더미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가지고 간 새끼로 멜빵을 만들어서 장작을 등에 한가득 졌다. 각 학교에 조개탄 지급이 중단되자 석탄 대신 장작을 난로용으로 사용하려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점심도 거른 채 나무 짐을 지고 나르는 장거리 행군에 지쳤다. 상서면을 지나면서 아이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장작을 길가에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기온은 급격히 내려갔고 낮에 녹던 눈길이 얼기 시작했다. 배는 고프고 아이들은 탈진해버렸다.
국민학교 아이들까지 동원해서 관솔을 따고 퇴비를 만들고 마초를 베고 새끼를 꼬게 했다. 4학년 이상 학생들은 운동장에 수십 대의 가마니틀을 열 지어 놓고 뙤약볕 아래에서 가마니를 짜고, 똥통을 메고 다니면서 학교 소유의 논밭에 거름을 줘야 했다. 봄에는 모 심고, 여름에 보리 베고, 피 뽑고, 가을에는 나락을 베었다. 발에 걸치는 것이라고는 각자가 삼은 조리(일본짚신)가 고작이었다. 조리는 사흘이 못가서 바닥이 뚫리기 때문에 골마리에 차고 학교에 다녔다. 맨발로 다니다가 교문에 들어갈 때만 조리를 꺼내 신기도 했다.


▲1940년대 초 부령국민학교 운동회(남학생들의 체조시범)


▲1940년대 초 부령국민학교 운동회


교실을 군인들에게 빼앗긴 터라 학생들은 교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문안의 예수교교회, 카토릭선교원학교, 오리정의 유씨네 매가리간 창고 등에서 공부를 했는데 제대로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날 좋은 날은 야외 풀밭이 있는 야산이나 아라지 방죽으로 나갔다. 낮에는 풀을 베어 할당된 양을 채워서 운동장 가의 반별로 구분된 퇴비박스에 퇴비를 쌓았다. 학교 논이 오리 떨어진 행안에 있었는데 학생들은 학교 인분을 나무로 된 똥통에 담아 둘이서 들고 가다가 수로의 똘두럭에서 넘어져 오물을 온통 뒤집어쓰기도 했다.
학교에는 우리 글, 우리 역사는 없고 황민화 정책에 의한 일본 고대 신화, 황실사, 일본역사, 일본말을 주로 배웠다. 학교 안에서는 우리말도 못하게 했다. 월초에 카드를 나누어주고 우리말을 하는 아이를 보면 카드 한 장씩을 뺏도록 했고 월말에 가서 카드 조사를 했다. 카드가 없거나 적은 아이들은 벌을 받았고 카드를 많이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칭찬을 받았으며 수신 과목 성적에 반영되었다. 우리말을 하는 아이는 불량하고 일본말을 잘하는 아이는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로 둔갑되었다.
부안 사람들도 전쟁에 내몰려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갔으며 지원병들은 성황산 밑의 신사에서 환송회를 받고 전장으로 떠났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가운데는 일본말을 하도 잘하여 일본인으로 착각할 정도의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조차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부안의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 두 건을 소개한다. 하나는 ‘폭격기 전북호 헌납’이라는 국방헌금에 부안에서도 대대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부안에서 당시 활동하던 돈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여기에 이름을 걸고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또 하나는 1920~40년 사이의 일제가 감시대상으로 삼은 인물들의 신상카드이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이 카드에는 19명이 부안과 관련된 사람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김철수, 김태수, 백남기, 신석갑 등이 그 인물들이다. 카드에는 사진과 아울러 출생일, 출생지, 주소지, 신장 등의 기본 신상 정보와 각종 활동 기록 그리고 검거 기록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카드에는 일제에 항거한 민족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두 자료에서 보듯 부안의 돈 있는 사람들은 일제에게 전쟁 헌금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상당수의 부안 사람들은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감시받고 있었다.




해방되던 날 학교 복도에는

해방되던 8월 15일은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여름 방학이어서 학교에 등교는 하지 않았지만 그냥 쉬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키우는 동물들 먹이 주는 것은 주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했다. 동문안에 살던 김복균은 친구들이랑 낫을 들고 해방되던 날 산으로 갔다. 일본 기마대가 신씨 선산에 주둔했는데 말에게 먹일 마초를 베어야 했다. 그날은 동문안 학생들이 마초를 베어다 주는 당번이었다.
심길동은 1945년 5월에 부안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났다. 학교는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본 군인들이 학교를 차지하여 교실에서 숙박을 하니 교사들조차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힘쓰기보다는 학생들을 인솔하여 노역하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심길동은 근무하던 중에 군인들의 수상한 움직임도 보았다. 8월 10일경 학교에서 숙직을 하는데 상사 정도 되는 군인 한 사람이 와서 전화를 쓰자고 했다. “당신들도 전화기가 있잖은가?” 하자, “거기에서는 쓸 만한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익산에 전화하는 것을 옆에서 들어보니 수상한 소리를 했다. “불리하니 가산을 정리해서 잘 챙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심길동이 내용을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8월 15일에 일본 국왕의 중대발표가 있다고 했다. 군인들은 무겁고 무표정한 얼굴로 부령국민학교의 길쭉하고 약간 어두운 복도에 모여들었다. 라디오를 중간에 두고 양쪽으로 네 줄로 도열하여 열심히 들었다. 방송을 듣자마자 이들은 자기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심길동은 12시 라디오 방송은 잡음이 많아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외부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학교로 소식이 들려왔고 교사들 중에는 벌써 연락이 와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고 있었다. 오후 3시에는 선명하게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교장 야마모토는 “항복할 바에야 대동아 전쟁으로 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느냐? 이렇게 끝내려면 무슨 지랄로 전쟁을 했냐.”라며 분에 못 이겨 혼잣말로 항복한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국방헌금 위문금(동아1937.10.23.) 부안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야마모토 교장에 대한 기억

임방규의 기록을 보자.8)

1945년 8월 16일 연락을 받고 학교에 가니 야마모토 긴소[山本 金藏] 교장이 연단에 올라와서 일본기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일본기가 서서히 내려왔고 교장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을 보고 “일본이 전쟁에 졌다.”고 했다. 자기들은 일본에 돌아가고 여러분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임방규는 집에 돌아오는 내내 ‘일본이 연전연승하여 항상 이긴다고 했는데 왜 졌지?’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 학생들 대부분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해서 일본의 승리가 곧 우리나라의 승리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갔더니 어른들은 해방이 되었다고, 평란(平亂)이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임방규는 해방이라는 상황이 크게 실감나지 않았다.
해방이 되었지만 부안의 일본 군인들은 자체 치안을 한다며 네댓 명씩 총칼로 무장한 채 부안 시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이들의 순찰은 거의 한 달여를 계속했는데, 부안에 사는 일본인을 지킨다는 명목이었고 한국인들은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항할 만한 아무런 무기도 없었으니 분을 삭이며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때문인지 부안에서는 해방 후에 일본인들의 피해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일제 말의 부령국민학교 야마모토[山本] 교장은 키가 작고 밤톨같이 단단해서 빈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너무 꼬장꼬장해서 교사들이 부령국민학교에 발령이 나면 거부하고 오지 않는 교사가 있을 정도였다.9) 교장은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일본 짚신(소리)을 만드는 시범을 보이는 등 나름대로 솔선수범하는 교사로 매번 학생들에게 작업 지시서를 만들어 놓고 퇴근했다. 오전 수업을 겨우 마치면 어린 1, 2학년은 돌려보내고 3, 4학년은 말 풀을 베러 나가고 5, 6학년과 고등과 1, 2학년은 방공호를 파러 갔다.
교장은 한국인 교사들에게는 교사라고 부르지도 않고 ○○군이라고 낮춰 불렀다. 교사들은 20여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10여 명이 한국인 교사였다. 5, 6명의 젊은 교사들은 전주사범 출신, 북중과 공업학교 출신으로 3종 시험에 합격하여 교사를 시작한 사람 등 다양했고 객지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부안 읍내 보다는 면단위의 시골에서 하숙을 했는데 저녁이면 서로 통하여 몰려다녔다. 이들의 자연스런 만남도 교장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느 날 선배인 이○○ 교사가 젊은 교사들에게, “당신들이 방과 후에 몰려다니는 것을 고등계 형사들이 유심히 살피고 수사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자중하라고 충고했다. 경찰들의 움직임은 알 수 없지만 교장의 뜻이 포함된 것으로 교사들은 생각했다. 학교에서 이들 교사들이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쓸 때면 오히려 학생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곤 했다.
아침에 하는 교직원회의도 의견을 발표하고 토의하는 그런 회의는 아니었다. 교장이 전날 지시한 작업 결과에 대한 평가를 하는 그런 회의였다. 교장은 오후가 되면 이곳저곳을 돌아본 후에 붓글씨로 작업 지시를 일방적으로 써놓고 퇴근하면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주어진 작업을 끝내야 했다.
증언자들은 해방이 방학 때라서 학교에 나기지 않았다는 얘기(김형주)부터, 해방 다음날 조회를 했다는 주장(임방규), 조회 시에 교장이 신사당의 위폐(天照大神을 모심)를 태워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주장(김복균) 등 다양했다. 해방 된 후에 교장은 바로 일본으로 갈 수는 없었다. 관사에서 살면서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15일 정도 학교에 가끔씩 얼굴을 보이곤 했다는 주장(심길동)도 있다. 기억이 갈리는 이유는 교장이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교장은 학교를 병영(兵營)으로 만들어 학생들을 성전(聖戰)이라 일컬어지는 전장으로 보내는 훈련소와 전쟁 물자를 만들어 전방에 보내는 병참기지 정도로 생각했다. 이런 속에서 그에 대한 기억이 다양하게 나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대해 충성심을 가진 사람이 ‘이보다 더한 것은 못하겠느냐’는 생각 속에서 이런 다양한 사실들이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지 않고 떠도는 것이 아닐까?


▲1941년 부령국민학교 학생들의 서림공원 봄소풍(사진제공 부안초등학교)


해방이 됐는데 왜 웃음이 나오지

한국 교사들은 해방에 무한 감사했다. 우리말을 되찾고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쓸 수 있었으니 이보다 큰일은 없다. 교사들은 앞으로의 희망에 대해서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일본인 교사가 떠난 뒤로 중학교 졸업자, 대학교 재학 중인 젊은이들이 교사로 새롭게 충원되었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배웠다.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 가르치는 선생님 말씀이 얼마나 어색했는지 몰랐다. 조선말로 하는 ‘차렷 경례’라는 구령이 우스워서 아이들은 킬킬댔다. 학교에서는 그동안 일본말만 사용하여 조선말을 모르는 선생님으로만 알았던 교사가 조선말을 쓰니 이 갑작스런 상황에 어이없어 모두 웃어버리고 딴 나라에서 온 분 같아서 어색하기조차 했다. 학교에서도 그동안 유별나게 일본의 황국신민화 교육에 앞장서거나 지나치게 열성을 다했던 교사들은 어깨가 처지고 초라한 몰골이었다. 남과 북이 나뉘면서 학교의 교사들도 좌우익으로 갈리기 시작하고 대립도 심해졌는데, 대체로 좌익진영에 가담한 교사들이 힘이 더 세게 보였다. 선생님 중에 어떤 분은 시내에서 삐라(전단)를 붙이고 다니다가 경찰에 쫓기기도 했다.
한번은 부령국민학교 6학년 학급 교실이 시끌짝 했다. ‘부반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진 것이다. 해방 전에 부반장은 일본인 선생에게 붙어서 학급 학생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다 고해 바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은 학생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부반장은 체격도 작고 힘을 쓸 것 같지도 않았지만 학생들은 맞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이발관을 하면서 선생님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통에 아들은 이것을 믿고 더 날뛰는 것 같았다. 이제 해방도 되었으니 이 학생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요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맞은 만큼 때려주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맞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때린 학생을 부반장이 업고 맞은 숫자의 절반만큼만 운동장을 돌게 하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뙤약볕이 내리 쬐는 한여름이고 구경하는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댔다. 혼자 뛰기도 힘든 여름 날씨에 동료를 업고 운동장을 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반장은 서너 바퀴 돌다가 땀을 비 오듯이 쏟으면서 운동장에 쓰러져버리는 통에 더 이상 진행을 못했다. 이들은 학교에서 일본에 기대어 폭력을 행사했던 학생에게 과거를 청산하도록 기회를 준 것이었다. 부반장은 그 뒤로 경찰로 진로를 정해 나아갔다.
1945년 여름에 큰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다. 사람들은 이 바람을 ‘해방바람’이라 했고 그리곤 해방은 바람처럼 왔다. 일본 국왕의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지만 궁벽한 시골에서는 라디오나 신문을 보는 집이 거의 없었으니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면 단위에서는 대개는 다음 날 이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어 어설픈 태극기를 집에 걸고 기쁨으로 들떴다. 징병과 징용을 피하여 숨어 있던 사람들도 그때야 나타나면서 거리는 활기를 띠었다. 해방의 소식은 16일에야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게 되었다. 한국인에게 해방은 일본인들에게는 절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보안면 성뫼의 허영철은 집에 있는데 읍내 갔던 사람이 와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일본 국왕이 정오에 항복 방송을 했다는 것이다. 허영철은 뛸 듯이 기뻐 읍내로 단숨에 달려갔다.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야단이었다. 16일에는 곳곳에 치안대가 조직되고 공출 받아서 쌓아 두었던 양식을 다시 돌려주기도 했다.10)


▲김찬규 교장, 신영달 교사 심길동 교사와 학생들(1946년으로 추정)


벚나무는 어떻게 잘려나갔는가

부령국민학교 운동장의 동쪽에는 간이 신사당이 있어서 학교에 등교하면 의무적으로 이곳에 들러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참배를 하고 교실에 들어갔으며 하교할 때도 반드시 이곳에 들러 하교 참배를 해야 했다.11) 신사당 주변에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있어 벚꽃이 필 때면 그 화사함이 대단했고 큰 그늘을 만들어 가을 운동회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해방이 되자 부안 사회에서는 벚꽃은 일본의 국화이고 일본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기 위해서 심은 거라면서 베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났다.
부령국민학교 교사들의 직원회의 시간에 신○○ 교사가 일어나서 벚나무를 끊어내야 할 이유를 밝혔다. “벚나무는 일본의 국화이고 일본의 혼을 나타내는 것인데 나라의 동량을 키워내는 학교에다가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에 두세 명 정도의 교사가 반대에 나서 “이미 학교의 나무로 굳어졌고 일본의 국화라는 사실을 알리고 그 폐해를 교육하면 될 일이지 꼭 베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베어내자는 주장이 워낙 강하다 보니 교사들 대부분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관망하는 분위기기 계속되었다. 이런 속에서 다수결로 벚나무를 베어내자고 결정하면서 오랫동안 학생들과 친근하게 지내왔던 벚나무는 친일의 나무로 규정되어 베어내고 말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친일파들이 일본을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부안 사회에서도 친일파 청산과 자주적인 국가 건설에 대한 매진이 필요했다. 이 중차대한 과정에서 벚나무 베기가 불거진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거리에 심는 벚나무나 벚꽃이 필 무렵 사람들을 끌어들여 축제를 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 속에 들어와 있던 친일의 잔재를 씻어내는 것이 시급했는데 먼저 벚나무 정도가 대상이 된 것은 문제의 논점에서 벗어난 것이다. 어느 시대나 애국이란 이름으로 논점을 흐리는 일들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황산에 오르다 보면 서림정 부근의 비석에는 일본인들의 이름이 파여졌다. 내소사의 부도군 뿐만 아니라 부안 전역에서 소화(昭和)라는 글자가 파인 곳은 여럿이다. 과연 이런 행위들을 용기 있고 적절한 행동이라고 박수만 치고 있어야 하는가? 이런 행동을 통해 친일의 잔재가 많이도 청산되었는가?
부령국민학교를 통해 해방 전후를 살펴보면서 일제 강점기에 조선 학생들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충성스럽게 노력했던 교사들부터 한번쯤 자신을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숨쉬기도 어려운 암울한 시대에 어쩔 수 없었고 자발적이지도 않은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아, 그랬냐?’고 이해한다며 면죄부를 주면 끝인가. 이즈음에 용기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일제의 의도에 분연히 맞서 목숨을 걸어야하니 어떠니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런 일들이 또 닥쳐올 거라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주-------
1)심길동(1926년생),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 순재.
2)임방규(1932년생),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당하.
3)김복균(1932년생),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4)김형주(1931년생), 부안군 부안읍 옹정 샛터.
5)신이근(1934년생),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6)이들을 부안에서는 관동군이라고 부르나 조선방면군사령부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적군(미군) 상륙에 대비하여 특별사단을 창설했다. 호조 1개 부대가 정읍에 전방지휘소를 설치하여 노령산맥을 중심으로 영광, 고창, 부안, 김제, 삼례, 고산 등 서해안에 이르는 모든 고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7)임방규, 『임방규의 기록』, 2010, 10쪽.
8)임방규, 앞의 책, 16쪽.
9)증언-심길동.
10)허영철,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보리, 2006, 73쪽.
11)김형주, 「내가 겪은 일제 식민 교육과 태평양전쟁」, 『부안이야기』 창간호, 2009, 45쪽.


/정재철(부안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부안이야기 14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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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 부안역사/문화기행 길에서 ‘부안’을 만나다 길에서 ‘부안’을 만나다 술회사 문 열리기를 천당같이 기두리고| 2017·04·19 01:12 | ▲동문안에 있는 2기의 석장승 김제 쪽에서 동진강 대교를 건너 부안읍내로 ... file 부안이야기 2017.04.25 53
776 부안역사/문화기행 백제 멸망의 진실-의자왕은 항복하지 않았다 백제 멸망의 진실-의자왕은 항복하지 않았다 | 2017·04·10 15:34 | ▲ 묘비명에 적힌 글귀, 에식진이 백제 웅천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웅진성주 배반으로 체포... file 부안이야기 2017.04.11 63
775 부안생태기행 진달래도 피고, 사스레피나무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사스레피나무도 피고... [2017년 4월 달력] '사스레피나무' | 2017·04·03 12:21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 file 부안이야기 2017.04.03 56
774 부안역사/문화기행 부여풍,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부여풍,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백제 부흥의 중심, 주류성 | 2017·03·27 09:35 | ▲우금산성(일명 주류성) 굴실-백제부흥운동때 복신이 칭병 우거했던 곳이라 ... file 부안이야기 2017.04.03 60
773 부안역사/문화기행 곰소에서 죽도를 보다 곰소에서 죽도를 보다 부안군과 고창군의 경계지, 신화와 역사의 접선지 | 2017·03·12 23:47 | ▲곰소에서 바라본 죽도 부안군과 고창군의 경계지 “어제 곰소항에... file 부안이야기 2017.03.12 63
772 부안역사/문화기행 길은 객사 앞에서 시작된다  길은 객사 앞에서 시작된다 [부안읍이야기1] 부안읍성과 지킴이 신앙 | 2017·03·06 00:02 | ▲부안동문안당산(중요민속문화재 제19호) 올해는 부안(扶安) 정명(... file 부안이야기 2017.03.12 58
771 부안생태기행 “닥나무 사촌 꾸지나무 한지 원료로 쓰여” “닥나무 사촌 꾸지나무 한지 원료로 쓰여” [2017년 3월 달력] '꾸지나무' | 2017·03·02 01:36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 file 부안이야기 2017.03.02 55
» 부안역사/문화기행 부령국민학교의 해방 전후 풍경 부령국민학교의 해방 전후 풍경 해방 전후 국민학생들은 뭐하고 놀았을까 | 2017·02·27 14:44 | ▲1947년 부안공립국민학교 졸업사진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 file 부안이야기 2017.03.02 61
769 부안역사/문화기행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열 세명의 천사들이 둥지를 튼 주산중학교 | 2017·02·13 04:42 | 하나. 새로 만난 천국의 아이들 거의 20년 만에 부안으로 다시 돌... file 부안이야기 2017.02.14 62
768 부안역사/문화기행 부안 김씨,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부안 김씨,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고려시대 부안 김씨 이야기| 2017·02·06 11:57 | ▲변산면 소재지인 지서리(知西里)-예전에 조수가 드나들던 포구마을로 땅이름... file 부안이야기 2017.02.14 60
767 부안생태기행 “화살대는 도이관에서 난다” “화살대는 도이관에서 난다” [2017년 2월 달력] '이대' | 2017·02·01 00:36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이라는 팝메뉴를 ... file 부안이야기 2017.02.07 62
766 부안역사/문화기행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1920~30년대 &lt;동아일보&gt;에서 찾은 기억| 2016·12·21 06:16 | ▲1980년 말에 찍은 사진으로 배말뚝 너머로 삼양사 매갈이간이 ... file 부안이야기 2017.02.07 75
765 부안생태기행 '단풍나무의 시샘’ '단풍나무의 시샘’ [2016년 11월 달력] '화살나무'| 2016·11·07 17:03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이라는 팝메뉴를 누르시... file 부안이야기 2016.11.16 90
764 부안역사/문화기행 "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 &quot;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quot; [줄포이야기2] &quot;줄포항엔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quot; | 2016·10·13 10:22 | ▲막내 동생과 줄포 집에서(1978) 과수원집 둘째 손자 줄포... file 부안이야기 2016.10.27 157
763 부안역사/문화기행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번영만큼이나 아픔도 큰 흔적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 2016·09·27 02:27 | ▲김상만 가옥에서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 우리... file 부안이야기 2016.09.27 137
762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상술재 너머 염소로와 가야개·동진개 | 2016·09·20 09:47 | ▲상술재 가는 길에서... 필자 「해동지도」에 묘사된 염소로 부안의 진산 ... file 부안이야기 2016.09.20 157
761 부안역사/문화기행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위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2016·09·12 06:32 | ▲망월봉에서 본 위도의 섬, 섬, 섬 위도(蝟島)는 고려시대 이래 부령현... file 부안이야기 2016.09.12 160
760 부안역사/문화기행 [전북일보]〈부안이야기〉 펴내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 [문화&amp;공감] 〈부안이야기〉 펴내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 '지역 역사·문화·삶, 문자로 쓰고 책으로 엮다 기고 | desk@jjan.kr / 최종수정 : 2016.06.13 23:4... 부안이야기 2016.06.22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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