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역사/문화기행

백제 멸망의 진실-의자왕은 항복하지 않았다

by 부안이야기 posted Apr 11, 2017
백제 멸망의 진실-의자왕은 항복하지 않았다


| 2017·04·10 1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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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명에 적힌 글귀, 에식진이 백제 웅천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웅진성주 배반으로 체포돼 당에 넘겨져

2006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시내에 있는 한 골동품상에서 백제 유민 예식진의 묘비명이 발견됐다. 이를 연구한 제주대학교 김영관 교수는 2007년 8월 ‘백제멸망의 진실-예식진의 배신’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예식진이 백제가 멸망할 당시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을 당나라에 넘겼고, ‘구당서(舊唐書) 소정방 열전’에 기록된 ‘예식’과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10년 4월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시 창안(長安)구 궈두난춘(郭杜南村)이라는 곳에서 당나라 중기 때 무덤 3기를 발굴했는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바로 예식진과 그의 아들 예소사, 손자 예인수의 무덤이었다. 출토 유물을 연구한 김영관 교수는 “발굴된 예씨 가문의 가족묘 중 예인수의 묘지명에 ‘할아버지가 중국 황제 고종에게 의자왕을 끌고 가서 바쳤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나온다.”고 밝혔다. 2012년 12월 KBS 1TV는 이를 토대로 ‘역사추적’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충격보고서 의자왕 항복의 비밀’이라는 4부작을 방영했다.

그러나 아직도 역사 교과서는 바뀌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삼국사기’ 기록에 매달려 있다. 서천은 의자왕이 1만2000여명의 포로와 함께 당으로 압송돼가던 마지막 모습을 당시 민중들이 바라보던 남산성이 있는 곳이다. 김영관 교수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의자왕은 항복한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밝히고자 한다.


▲ 예식진 묘비명


‘삼국사기’의 기록

왕의 사후에 ‘시호(諡號)’를 내리게 되는데 ‘의자왕(義慈王)’이란 시호에서 보듯 의자왕은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었다. 서기 641년 선왕인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을 때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무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義慈王 武王之元子 雄勇膽決 武王在位三十三年 立爲太子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武王薨 太子嗣位)”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공자의 적통을 이었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의자왕이 즉위했을 무렵 의자왕에 대한 평가는 이와 같았다.
의자왕은 성충을 상좌평으로 기용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당과 동맹을 맺은 신라를 침공해 신라로 하여금 당을 돕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펴며 대야성(오늘의 경남 합천)을 점령하기도 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의자왕 16년(서기 656년)부터 백제에 대한 기록이 예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다. 백제 멸망의 당위성을 드러내려는 듯 백제 멸망의 징조들을 집중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두고 사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이 무렵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 좌평 임자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신라 관료 출신의 포로노예 조미압을 통해 좌평 임자를 포섭한다. 김유신은 임자로 하여금 백제 조정에 내분을 일으키도록 하고 그를 통해 백제 사정을 손바닥 보듯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조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16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 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 연개소문, 신라에 김춘추가 있었다면 백제에는 성충이 있었다. 성충이 옥사한 이후 ‘삼국사기’는 백제 멸망을 징조들을 열거하듯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의자왕 20년(660년)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전투 양상은 예전과 달랐다. 점령지역을 확장하고 주변을 무너뜨린 후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비성 함락을 목표로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온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소 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 때 당 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 오고, 소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 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王及太子孝 與諸城皆降) 소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2807명을 당 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웅진성주 예식의 배반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당나라군이 육박해 오자 7월 13일(음력)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피한다. 그러나 사비성에 남아 있던 아들들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자신도 성을 나와 스스로 항복한 것으로 되어있다. 웅진성에서 전열을 정비하며 농성전을 편지 닷새만인 7월 18일의 일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비성 함락의 모습이며 의자왕의 최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義慈 率 太子及雄鎭方領軍等 自雄津城來降)고 돼 있다.


▲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 나오는 의자왕 항복 관련 기사. 예식 장군이 항복의 주체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백제의 선봉이 무너졌을 뿐 지방조직이 건재해 있는 상황에서 의자왕이 쉽게 항복할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뭔가 감춰진 비밀이 있을 거라는 의심은 예전부터 있었다.
중국의 사서인 ‘구당서’ 소정방전에는 “백제의 대장(大將)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했다”고 기록함으로써 항복의 주체를 대장 예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將’자가 명사로 쓰일 때는 ‘장수’라는 듯이지만 동사로서 ‘거느리다’ ‘데리고 간다’라는 의미가 있다.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웅진성의 수성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여 가니라.”

‘삼국사기’에도 의자왕의 항복이 수상하다는 의심을 할 만한 대목이 있다. “처음에 항복의 대열에 함께 했던 흑치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初 黑齒常之 嘯聚亡散, 旬日間, 歸附者三萬餘人)는 기록이 있다.
웅진성은 선왕인 무왕 때 임시 수도로 사용하기도 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또한 가까이에 임존성이 있다. 의자왕은 두 성이 서로 지원하며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지방에 건재한 조직들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면 적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임존성은 이후 3년 동안 백제 부흥군의 주요 거점이었다.


웅진성주 예식은 누구인가

백제는 전국을 오방(五方)으로 나누어 통치를 했는데 예식은 웅진방의 통수권자인 웅진방령이었다. 그는 백제 후방의 주력군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웅진방을 보루로 삼아 당나라와 싸우려 의탁해 온 왕을 배신하고 그를 사로잡아 당나라군에게 바쳤던 것이다.
2006년 중국 허난성 뤄양에서 발견된 예식진의 묘비명에는 그를 ‘백제웅천인(百濟熊川人)’으로 표기하고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나오는 예식장군과 예식진은 동일인이다. ‘예식’이 당나라에 귀화한 이후 ‘예식진(禰寔進)’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예식진의 묘비명에 그의 조부는 좌평 ‘예다(譽多)’이며 부는 부좌평 ‘사선(思善)’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인들의 묘지명에는 보통 증조부부터 기록을 하는데 예식진의 경우에는 조부부터 기록했다. 또한 백제에서 좌평 이상 벼슬을 한 귀족 성씨 중 ‘예’씨가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선왕인 무왕이 웅진성에 있을 때 발탁한 신흥 정치세력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예식은 의자왕을 체포해 항복한 공로로 당 조정에서 정3품 벼슬인 ‘좌위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황제의 경호 책임을 맡은 고위 관직이다.

그의 손자인 예인수의 묘지명에는 “할아버지가 중국 황제 고종에게 의자왕을 끌고 가서 바쳤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나온다. 이를 두고 김영관 교수는 “손자인 예인수에 이르러서는 백제인의 정체성을 잃고 당의 백성으로 동화되는 과정이 드러난다.”며 “백제 멸망의 악역을 담당해 놓고도 책임의식이 희박해져 노골적으로 할아버지의 활약상을 묘비명에 거리낌 없이 서술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의자왕이 스스로 성을 나와 항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는 교과서는 바뀌지 않고 있다. 이는 우리 역사학계의 보수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허정균(뉴스서천 편집장)
 
<부안21>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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