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역사/문화기행

길에서 ‘부안’을 만나다

by 부안이야기 posted Apr 25, 2017
길에서 ‘부안’을 만나다
술회사 문 열리기를 천당같이 기두리고
| 2017·04·19 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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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안에 있는 2기의 석장승


김제 쪽에서 동진강 대교를 건너 부안읍내로 들어서다보면 길 오른편에 서있는 2기의 석장승을 만나게 된다. 옛적에는 부안읍성의 동문 청원루(淸遠樓)가 있던 곳이다. 이곳을 시작으로 성황산까지 부안읍내를 걸어보기로 했다. 이 땅과 길에서 우리의 과거 흔적과 현재, 잘 보면 미래까지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문에 들어서니

마을 입구에 석조 신간 1기가 있고 지척의 큰길가에 2기의 석장승이 서 있다. 동문안당산이다.1) 그 형태나 기능, 규모는 서문안당산과 비슷하다. 그리고 건립된 연대의 명문은 없지만 서문안당산과 같은 17세기 말경으로 볼 수 있다. 이곳은 할머니 당산이 없는 홀아비 당산이다. 원래는 길가에 있는 주염나무 한 그루가 할머니 당산이었는데 도로 확장 공사 때 없어졌다고 한다. 석조 신간은 높이 352㎝이며 석간 위에 석조 오리가 서북향으로 앉아 있다. 오리는 길이 58㎝, 높이 15㎝이다. 그러나 근래에 누군가에 의해 이 오리가 사라졌다. 이 석간에는 당산제 때 줄다리기에 사용한 동아줄을 감아놓았다.
부안읍내의 동북부에 위치한 이 동문안당산의 원래 위치는 동중리 3구 마을 391번지이다. 이곳은 성곽의 동문인 청원루가 있던 곳으로 성문 안쪽 마을이다. 성곽 동문을 막 지나면 남녀 한 쌍의 석장승이 길을 사이로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다.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왼쪽에 있는 석장승을 오른쪽으로 옮겨 놓았다. 재질은 모두 화강석이고, 투박하게 조성되었는데 밑에는 모두 기대석이 깔려 있다. 이 석장승들은 ‘당산하나씨’, ‘당산할머니’, ‘문지기장군’이라 불리고 있다.
남신인 당산하나씨 장승은 여신인 당산할머니보다 작은 180㎝로 갓 또는 벙거지와 같은 모양을 머리에 썼으며 밑으로는 희미하게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는 명문이 보이나 마모가 심하다.
여신인 당산할머니는 체구가 큰 편으로 223㎝의 높이에 밑둘레가 85㎝이며 긴 턱에 아랫 이빨을 내보여 다소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 복부에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음각된 명문이 보이는데 역시 마모가 심하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2년마다 정월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고 풍물과 함께 줄다리기를 한 후에 당산에 옷을 입히는 민속이 전해지고 있다. 동문안 당산제의 제의는 줄다리기로부터 시작된다. 용줄은 외줄로 꼬아 만드는데 짚으로 길게 가닥줄을 비벼 여러 겹으로 결합하여 꼬아 만든다. 이 용줄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마을돌기를 한다. 당산거리에서 남녀 두 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한 다음 ‘할아버지 옷 입히기 놀이’를 한다. 솟대의 신간주를 용줄로 칭칭 감아 주는 행사다.
동문안 당산제는 전형적인 동구당산의 제의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며 축제 분위기 속에서 화합과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아름다운 마을 문화이다.


술회사 문 열리기를 천당같이 기두리고

시인 신석정(辛夕汀, 1907~1974)의 「귀향시초(歸鄕詩抄)」 라는 시가 있다. 이 시의 소재가 된 ‘술회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부안읍 선은리의 양조장이다. 그 일부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술회사 앞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수대며 자배기를 들고 나와서 쇠자라기와
  술찌겅이를 얻어가야 하기에 부세부세한 얼굴들을 서로 쳐다보면서 차표 사듯
  늘어서서 꼭 잠겨 있는 술회사문이 열리기를 천당같이 기두리고 있습데다.

  장에 가면 흔전만전한 생선이 듬뿍 쌓여 있고 쌀가게에는 옥같이 하얀 쌀이
  모대기모대기 있는데도 어찌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쌀겨와 쑤시겨전을
  찌웃찌웃 굽어보며 개미같이 옹개옹개 모여 서야 하는 것입니까?
  쌀겨에는 쑥을 넣는 게 제일 좋다고 수근수근 주고받는 이야기가 목 놓고
  우는 소리보다 더 가엾게 들리드구만요.



▲부안주조장(1957년)


▲부안양조장(2001년)


1952년 4월에 쓴 이 시는 1956년에 발간한 『빙하』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 산문체의 이야기처럼 서술하고 있고 마치 미술에서 밑그림을 그리듯 자유롭고 아름답고 감칠맛 나는 방언을 구사하고 있다. 부세부세 · 모대기모대기 · 찌웃찌웃 · 옹개옹개 같은 형용사가 이 시의 운율과 친근감을 더한다.
띠뿌리(풀뿌리)와 송피(소나무껍질)와 나물과 술찌꺼기로 끼니를 때우던 한국전쟁 후의 궁핍한 생활을 시에 담았다. 이런 현실을 가져온 사회현상과 역사 인식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시에서 무슨 해답을 건지려는 것이 아닌 이상, 그저 읽기만 해도 당시 상황이 아프게 가슴을 파고든다. 한국전쟁에서 좌우 대립의 장황한 기록도 중요하지만 전쟁 한편에서 부대낀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도 한번쯤 반추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시가 보여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의 존재 의미가 있을 것이다.

왜정 때는 천야장구[川野長久]가 경영했던 부안에서 제일 큰 술회사였으며 나는 늘상 학교 가는 길에 술회사 앞을 지나면서 인근 동진면 마을에서 찾아온 아낙네들의 부세부세한 얼굴들을 희한하게 쳐다보면서 어린 시절 이 길을 지나다녔다. - 김민성, 『신석정의 문학과 인생』에서

선은리의 이 양조장에서는 약주와 소주와 막걸리를 만들었다. 부안의 술회사는 가와노 형제 가운데 가와노 히로쓰미[川野弘濟]가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부안양조장’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토속주 등을 팔고 있다.
시에서 보듯이 부세부세한 얼굴을 한 아낙네들이 새벽 일찍 나와서 수대와 자배기를 들고 쇠자라기와 술찌겅이를 얻으려 나래비를 섰다. 쇠자라기는 소주를 내리고 난 찌꺼기이고 술찌겅이는 곡식으로 술을 빚은 후에 막걸리를 짜내고서 남은 술 찌꺼기를 말하는 것인데 술지게미 혹은 술비지라고도 한다. 평시에 이런 찌꺼기는 돼지먹이였다.
누구에게는 취기를 돋우는 기분 좋은 술회사로 보이지만, 끼니를 거르는 어려운 사람에게는 버려야 할 술찌겅이라도 얻어와야 가난한 배라도 채울 수 있는 곳이었다.
「귀향시초」의 무대가 되었던 이곳은 3년 전에 시설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왔던 건물이 모두 사라져서 아쉽기만 하다.


일본인 집이 무송병원으로

부안에 있던 일본식 집들은 지금 많이 사라졌다. 특히 본정통에는 일본인 집들과 상점이 꽤 있었는데 최근 몇 년간 정비사업 과정에서 없어졌다. 군산이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건물을 근대문화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간직하며 관광문화 자원으로 되살리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무송병원이 있던 동중리 240번지가 있는 토지는 오구치(野口勘次)에서 오카다(岡田)로, 대기와(大究)로 소유주가 바뀌었다. 해방 후에 이 적산(敵産) 가옥은 김영묵(金永默)의 소유가 되었다. 김영묵은 이집에서 무송(茂松)병원을 열어 운영했다. 이곳에서 치료받았다는 사람들이 여럿이고, 한국전쟁 때는 부상병들이 치료를 받았던 유명한 병원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최초 부안보건소로 쓰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김영묵이 보건소장이었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966년에 펴낸 『부안대관』에 현 주소인 동중리 240번지인 이곳을 보건소로 지목하고 소장을 김영묵(고창인)으로 밝히고 있다.2) 그리고 보건소 청사를 1963년 3월에 부안읍 동중리에 신축할 때까지 이곳은 보건소 건물로 쓰였다고 한다.3)
현재 이 건물에는 안내판이 없는 것은 물론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기와가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시급하게 손을 봐야할 곳이 여럿이다.


▲부안보건진료소와 김영묵 소장


▲옛 무송병원의 현재 모습



한국 청년들이 잡혀간, 마루모야 술집

◀ 일본인이 운영하던 2층 고급 요정 마루모야

부안군청 옆에는 해방 후에는 부안교육청 건물로 쓰였고, 그 후로는 최근까지 부안공공도서관으로 이용되다가 지금은 리모델링 중인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있던 거리는 일제강점기에는 음식점이 즐비한 번화가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2층 고급요정 마루모야[丸茂屋]와 술집 모리[もり]다.
마루모야는 일본주인 카마야기쿠[釜谷キク]가 여 종업원들과 여러 개의 객실을 두고 운영하는 음식점 겸 여관이었다. 마루모야는 문을 연 지 꽤 오래되었고 좌담회도 열리고 접대도 하는 유명한 요정이었는데, 해방 직전의 일화 하나가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남선교통주식회사 직원 최상욱(崔相煜, 22세)은 군농회지도원 김병은(金炳殷, 27세)과 같이 마루모야에 갔다. 최상욱은 분위기가 오르자 조선인 종업원에게 맘속에 쌓였던 말들을 쏟아냈다. “너는 분명 조선 사람인데 어찌 조선말을 쓰지 않지?” 다음에도 이곳을 찾은 그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데, 이것이야말로 말로만 그치는 것 아닌가? …… 말로만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외치면서 군대에서조차 차별 대우를 하니 어찌 견디겠는가?”하고 울분을 토했다. 1943년 5월 말의 일이었다.
부안경찰서 특고(特高, 고등경찰)들은 부안읍 동중리에 살던 이들을 체포한다. 일제는 사상통제와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최상욱을 큰 범죄자로 몰아갔다. 일제가 의도한 전시동원체제로 끌고 가려는 것을 방해하는 선동가로 그를 지목했던 것이다. 동시에 마루모야 사건은 궁벽한 시골 부안을 한순간에 침묵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자기 검열과 스스로를 통제하고 위축시키는 공포 효과를 자아내는데 톡톡히 일조했다.
마루모야는 비록 일본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이었지만, 최상욱에게는 식민지 시대의 슬픔과 울분을 토해내는 작은 해방구였다. 그러나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하는 사적인 말조차 일제는 용납하지 않았다. 일제는 침묵을 강요했지만, 최상욱은 이를 따르지 않고 소신을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고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일제가 붙인 죄목은 지금은 잘 쓰지도 않고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조언비어’다.4)


진석루와 돌팍거리

1) 부안의 관아

부안고을을 다스렸던 수령인 현감이 근무하는 관아 즉 동헌은 돌팍거리에 있었다. 지금 군청의 바로 뒤 중앙감리교회가 있는 곳이 바로 그 자리였으며 동헌의 이름은 패훈당(佩訓堂)이라 했다. 패훈당 동편 일대가 모두 암반으로 되어 있어서 이 일대를 돌팍거리라 부른다. 돌팍거리에는 장방청과 옥(獄 : 감옥)이 있었다. 한뼘거리 옆이 노휴재이고 그 위에 고을의 원로들이 모여 군정을 자문했던 향청(鄕廳, 유향소 留鄕所)이 있었다.
동헌 앞에는 진석루(鎭石樓)라는 2층 누정이 있었다. 그 아래에 홍살문이 서 있었고 그 옆으로 형방청과 질청(작청, 이방의 근무처)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일제강점기에 경찰서를 지었으나 2000년 이후 행안면 송정마을 앞으로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지금의 부안군청이 들어선 자리는 옛 부안의 객사(客舍)가 있던 자리다. 조선조 시절에는 모든 고을의 수령이 근무하는 관아 앞 또는 동편에 객사를 두어 임금의 전패(殿牌)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의 예를 갖추도록 했고 신구 수령의 이·취임식도 이곳에서 행해졌다. 고을 수령이 궁궐로부터 먼 외방으로 나와 임금을 대신하여 칠사(七事, 고을의 수령이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정책)를 펴지만 항상 임금의 명을 받아서 대신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형식이 객사이다. 그 외에도 사신이나 관리들이 출장을 오거나 타지에서 온 양반들이 유숙하기도 하였다.
부안고을의 옛 이름은 ‘부풍(扶風)’이고 객사의 이름은 부풍관(扶風館)이라 하였다. 부풍관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6년에 복원하였었으며 1926년에 이를 없애고 그 자리에 군청을 지었다.



2) 진석루와 돌팍거리

이 책의 표지 그림은 2층 다락이 있는 진석루(鎭石樓)와 옛 건물이 담긴 엽서다. 건물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여 퇴락한 것으로 보아 한일병탄 후로 추정해 본다. 이 엽서는 지금의 군청이 있는 곳의 뒤편의 모습이다. 성황산을 오르는 큰 길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풍경들이지만 지금은 이 건물들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다.
진석루는 문이 있는 누각이다. 수령이 집무하는 바깥쪽에 있고 문이 세 개가 있으니 외삼문(外三門)이다. 이 안쪽으로 있는 내삼문을 지나면 동헌이 있을 것이다. 진석루 앞과 주변에는 돌이 많았다. 이런 돌을 누를 필요에서 ‘돌을 누른다’는 뜻의 진석루가 선 것이다. 진석루 앞을 삼문거리, 주변을 돌팍거리라 불렀다.

3) 금석문(金石文)

주림(珠林)지역

부안현감 박시수(朴蓍壽)가 쓴 글이 있다. 봉래동천(蓬萊洞天)과 주림(珠林) 옥천(玉泉)이다. 옥천에 고이는 물은 암반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주민들의 얘기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옥천에서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옛부터 중국에서는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 봉래산(蓬萊山)을 신선이 산다는 상상의 산으로 삼신산이라 했다. 부안에도 봉래산, 봉래루, 봉래구곡 등 봉래라는 명칭을 붙인 곳이 여러 곳에 있으며, 봉래동천이란 말은 신선이 살 정도로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란 의미다.


▲‘珠林(주림)’, ‘玉泉(옥천)이 쓰인 바위

혜천(惠泉)지역과 서림(西林)
혜천 지역의 금석문은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중엽까지 약 100여 년 간에 걸쳐 이 고을의 원과 이 지역의 인사들이 이곳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지은 시를 암반에 새겨 놓은 것이다.
혜천 주변의 금석문은 대부분 서림공원의 풍광과 혜천이라는 샘에 대해 읊은 시로써 모두 20수가 새겨져 있으며, 기타 이름과 생년만을 새겨 놓은 것이 4개, 확인이 불가능한 것까지 모두 25편이 확인되었다.5)

상소산 맑은 정기 솟구치는 작은 정자가에
한 웅큼 은혜로운 샘물 바위틈새 시원하네
선녀들이 내려와서 다투어 길어다가
깊은 밤 단약 만드느라 다 밭아질까 두렵네
- 신경환


혜천을 지나면 곧 서림정이 있는 서림공원에 닿는다. 관아의 서쪽에 있는 숲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곳에는 1927년에 서림정을 복원하면서 주도한 사람들을 새겨놓은 비석이 있다. 그 옆으로는 부안현감들의 선정비가 즐비하다.
일제 강점기에 서림지역을 공원으로 새롭게 정비하는데 그치지 않고 확장하는 등 관심을 크게 두었다. 1934년에는 이곳에서 각 신문지국연합 주최로 제 1회 부민원유대회가 열렸다. 회원 30여 명이 여흥을 즐겼다. 끝 순서로 그날 참여한 부안의 기생 20여 명을 대상으로 미인투표를 하기도 했다.6) 서림지역은 읍내에서는 야외처럼 여흥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동헌 옆 서편으로 내아(內衙, 군수의 사택)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이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일본인들이 개국신화의 큰 신으로 받드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시는 신사당(神社堂)을 세웠다.


부안읍 성터 주변에는 젊은이들이


◀ 서림공원 확장과 시내도로 신설 기사(동아일보 1936. 3. 28)

부안읍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가 16,450자, 높이가 15자, 안에 샘과 우물이 16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여지도서』, 부안현편, 1760년간) 여기서는 석성(石城)으로 나오나 어떤 자료에는 토성(土城)으로도 나온다. 이것은 성을 쌓고 시간이 흘러 개축의 과정에서 빚어진 혼동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부안읍성은 평산성(平山城, 평지와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의 형태로 그 규모가 다른 읍성에 견주어 이례적으로 컸다. 지금 부안읍성의 자취는 성황산의 서쪽에서 그 흔적의 일부를 찾아볼 수 있을 뿐 시내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성벽이 지나간 자취를 추적하면 동문을 기점으로 동문안 마을의 동편 구릉을 따라서 동남으로 내려오다가 읍사무소 뒤 낭주식당을 지나 남일당 한약방 앞 근처에서 남문을 조성하고 부안초등학교 뒤를 지나서 옛 천주교당(청우공민학교) 옆으로 해서 성황산 서편으로 올랐다. 성황산으로 오른 성벽은 성황사 옆을 감고 돌아 북동편의 가파른 산을 내려와 동문으로 이어졌다.
부안읍성이 감고 돌아간 높이 188m의 산이 성황산이다. 일명 상소산(上蘇山)이라고도 한다. 성황산이라는 이름은 어느 고을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치소의 뒷산 즉 진산(鎭山)을 그렇게 불렀다.
부안읍성은 넓고 튼튼하게 조성되었다. 진산인 성황산 밑 그 중앙지에 관아의 으뜸 건물인 동헌(東軒, 군수의 집무처)을 비롯하여 객사, 내아, 질청, 형방청, 장방청, 호장청, 사령청, 향청, 장청, 사고 등의 관청을 배치하여 고을을 다스렸으니 읍성은 이들 관아 건물들의 튼튼한 지킴이인 셈이다.
지금 남아 있는 성터 주변에 상당히 넓은 공간이 있다. 5~60년대 젊은 남녀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 이곳을 찾곤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경찰서에 풍기문란으로 신고하여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산 넘어 가는 길, 상술재

성황산은 부안을 감싸는 역할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넘어 걷던 옛길이 숨어 있다. 상술재는 성황산 서쪽으로 하여 향교 뒤로하여 염소로(鹽所路)로 이어지는 길이고 황계재는 성황산 동쪽의 등허리를 타고 동진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부안의 진산 상소산의 능선에는 상술재가 있다. 읍내 쪽에서 오르자면 지금의 당산로에서 성터길을 타고 서북쪽으로 오른다. 구 천주교 교회 자리와 구 청일암을 좌우로 하며 향교로 들어서는 갈림길에서 윗길로 능선에 오른다. 향교의 무거운 지붕이 올려다 보이는 상술재 정상에 이르면 시원한 서해 바람이 감겨오고 서쪽으로 염소로가 일자로 뻗어 있다.7) 계화에 이어 새만금 간척공사로 범선이 떠있던 바다는 새로운 변모와 논란 속에 있다.
지금은 농공단지가 생겨 길이 사라져버렸지만 1970년대 버스노선이 생기기 전까지는 재 너머 행안면, 동진면, 계화면 사람들의 주된 도보 길이었다. 향교를 드나들던 유인들, 초등학교 학생들, 읍내 관공서를 찾거나 장터꾼들이 이 길을 많이 이용했다.


▲부안읍 성터의 흔적(왼쪽), 상술재로 가는 길(오른쪽)


글을 맺으며

서양 책 중에는 ‘골목기행’이라는 제목의 책들이 여럿이다. 작은 골목들이 이어지는 마을을 걸을 수 있도록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부안읍내에는 골목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집까지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이것만큼 편리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개발과 편리를 위해 옛길들을 없애거나 직선화시키고 옮기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부안읍내를 걸으며 느낀 것은 우선 안내판이라도 만들어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군청 앞의 일제강점기 금융 관련 건물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안내판이라도 세워놓으면 어떨까. 건물이 거추장스럽다는 인식보다는 이왕에 중요도에 따라 등록되었다면 건물을 알리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도 찾아야 할 것이다. 군산은 천덕꾸러기 같이 방치되었던 일제강점기의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아픈 건물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어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우리 지역도 부안읍내와 백산삼거리, 줄포 등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지금이라도 여러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일제강점기 건물들이 여럿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역사문화의 부안’을 염두에 둔다면 채석강이나 변산을 찾는 방문객들이 지역 문화의 모태인 부안읍내의 역사 흔적도 찾을 수 있는 방안을 여러모로 강구해야 한다. 지금도 부안에는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 여럿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지우기는 쉽지만, 필요에 따른 복원은 어려우니 정책 결정 과정에서 숙고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 부안 읍내를 돌아보면서 ‘개발과 보존은 대립 관계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지만, 현 단계에서는 단순한 대립이기보다는 상호 보완과 대화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
1) 김형주, 『향토문화와 민속』, 선명출판사, 1996, 318~321쪽.
2) 부안군번영회, 『부안대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66, 382쪽.
3) 변산문화협회, 『부안향토문화지』, 삼성인쇄주식회사, 1980, 205쪽.
4) 국가기록원(관리번호 CJA0001817), 「판결문」(전주지방법원, 1943.9.25.) 및 정재철, 『사진으로 보는 해방 전 부안풍경』, 부안역사문화연구소, 2016, 207~221쪽 참조.
5) 원광대학교박물관, 『부안서림공원내 금석문조사보고서』, 부안군청, 2000, 14~15쪽.
6) 「동아일보」, 1934년 5월 31일.
7) 최기인, 「부안의 옛길을 따라」, 『부안이야기』 14호(부안역사문화연구소, 2016년 여름), 98쪽.


/정재철(부안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 부안이야기 15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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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4 부안역사/문화기행 부여풍,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부여풍,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지만 백제 부흥의 중심, 주류성 | 2017·03·27 09:35 | ▲우금산성(일명 주류성) 굴실-백제부흥운동때 복신이 칭병 우거했던 곳이라 ... file 부안이야기 2017.04.03 60
773 부안역사/문화기행 곰소에서 죽도를 보다 곰소에서 죽도를 보다 부안군과 고창군의 경계지, 신화와 역사의 접선지 | 2017·03·12 23:47 | ▲곰소에서 바라본 죽도 부안군과 고창군의 경계지 “어제 곰소항에... file 부안이야기 2017.03.12 63
772 부안역사/문화기행 길은 객사 앞에서 시작된다  길은 객사 앞에서 시작된다 [부안읍이야기1] 부안읍성과 지킴이 신앙 | 2017·03·06 00:02 | ▲부안동문안당산(중요민속문화재 제19호) 올해는 부안(扶安) 정명(... file 부안이야기 2017.03.12 58
771 부안생태기행 “닥나무 사촌 꾸지나무 한지 원료로 쓰여” “닥나무 사촌 꾸지나무 한지 원료로 쓰여” [2017년 3월 달력] '꾸지나무' | 2017·03·02 01:36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 file 부안이야기 2017.03.02 55
770 부안역사/문화기행 부령국민학교의 해방 전후 풍경 부령국민학교의 해방 전후 풍경 해방 전후 국민학생들은 뭐하고 놀았을까 | 2017·02·27 14:44 | ▲1947년 부안공립국민학교 졸업사진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 file 부안이야기 2017.03.02 61
769 부안역사/문화기행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열 세명의 천사들이 둥지를 튼 주산중학교 | 2017·02·13 04:42 | 하나. 새로 만난 천국의 아이들 거의 20년 만에 부안으로 다시 돌... file 부안이야기 2017.02.14 62
768 부안역사/문화기행 부안 김씨,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부안 김씨, 중앙 정계에 진출하다 고려시대 부안 김씨 이야기| 2017·02·06 11:57 | ▲변산면 소재지인 지서리(知西里)-예전에 조수가 드나들던 포구마을로 땅이름... file 부안이야기 2017.02.14 60
767 부안생태기행 “화살대는 도이관에서 난다” “화살대는 도이관에서 난다” [2017년 2월 달력] '이대' | 2017·02·01 00:36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이라는 팝메뉴를 ... file 부안이야기 2017.02.07 62
766 부안역사/문화기행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신문기사 속에 살아 있는 줄포이야기 1920~30년대 &lt;동아일보&gt;에서 찾은 기억| 2016·12·21 06:16 | ▲1980년 말에 찍은 사진으로 배말뚝 너머로 삼양사 매갈이간이 ... file 부안이야기 2017.02.07 75
765 부안생태기행 '단풍나무의 시샘’ '단풍나무의 시샘’ [2016년 11월 달력] '화살나무'| 2016·11·07 17:03 | 이용방법 : 그림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배경으로 지정'이라는 팝메뉴를 누르시... file 부안이야기 2016.11.16 90
764 부안역사/문화기행 "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 &quot;나를 키운 건 8할이 줄포다!&quot; [줄포이야기2] &quot;줄포항엔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quot; | 2016·10·13 10:22 | ▲막내 동생과 줄포 집에서(1978) 과수원집 둘째 손자 줄포... file 부안이야기 2016.10.27 157
763 부안역사/문화기행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번영만큼이나 아픔도 큰 흔적 [줄포이야기1] 줄포의 숨결을 따라 걷다 | 2016·09·27 02:27 | ▲김상만 가옥에서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 우리... file 부안이야기 2016.09.27 137
762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부안의 옛길을 따라 걷다 상술재 너머 염소로와 가야개·동진개 | 2016·09·20 09:47 | ▲상술재 가는 길에서... 필자 「해동지도」에 묘사된 염소로 부안의 진산 ... file 부안이야기 2016.09.20 157
761 부안역사/문화기행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위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2016·09·12 06:32 | ▲망월봉에서 본 위도의 섬, 섬, 섬 위도(蝟島)는 고려시대 이래 부령현... file 부안이야기 2016.09.12 160
760 부안역사/문화기행 [전북일보]〈부안이야기〉 펴내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 [문화&amp;공감] 〈부안이야기〉 펴내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 '지역 역사·문화·삶, 문자로 쓰고 책으로 엮다 기고 | desk@jjan.kr / 최종수정 : 2016.06.13 23:4... 부안이야기 2016.06.22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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